2006년 대만 영화입니다. 상업 영화라기 보다는 아트하우스 영화에 가깝고요. 이듬 해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에 노미네이트 되었습니다. 그 과정엔 우여곡절이 있어서 어떤 영화 대신 후보에 올랐다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긴 하지만, 이 영화 자체로도 그 감상이 좋은 편입니다.
대략 줄거리. 주인공인 밍은 졸업을 앞둔 대만의 대학생입니다. 청각 장애를 갖고 있는 밍은 졸업을 앞두고 해안을 따라 전국 투어에 나서기로 해요. 자전거를 타고 기타를 매고서요. 여행 중에 밍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 중엔 영화를 찍는 무리도 있고, 또래의 사이클 선수도 있고, 학교 여선생, 피크닉을 나온 가족, 팝 스타를 꿈꾸는 뮤지션들, 자신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기타 등등…… 밍의 주변을 많은 사람들이 스치고 지나갑니다.
밍이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겐 각자의 고민과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엄마와 불화를 겪고 있고, 어떤 이는 연금을 타기 위해 아직은 이른 은퇴를 결심하며, 또 어떤 이는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해 분노를 터뜨리죠. 각각의 인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 스펙트럼이 넓습니다. 개인적이고도 소소한 문제부터 대만이라는 국가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인 갈등, 그들의 역사와 과거, 자연에 대한 인간의 파괴력 등에 대해서도 한마디씩 언급하죠.
그런데 그게 다입니다. 그게 끝이라고요. 그런 화두는 그냥 피상적이죠. 영화는 상황과 문제들을 제시만 할 뿐, 어떤 특별한 답을 내리거나 구하는 데엔 별로 관심 없어요. 영화의 입장이나 관점도 보여주지 않는 거죠.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문제들에 대해 철저히 제 삼자의 입장을 취합니다.
게다가 줄거리를 훑어보셨겠지만, 로드 무비처럼 보이는 이 영화는 진행되고 있는 특별한 이야기가 거의 없습니다. 한 시간 사십 분을 넘는 러닝타임 내내 카메라는 기타를 메고 자전거로 여행을 하는 밍의 주변으로 자연 풍경과 여행 중에 만나는 사람들을 담다가 끝나죠.
(상업 영화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이런 자세가 과연 영화적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어요. 사실, 관객들이 참견할 일은 아니죠. 그저 화면에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들과 연기(라기 보다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모습)를 보는 것만으로 이 영화는 감상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특히 혼자 여행하는 것에 대한 낭만을 알고 있는 관객이라면 더욱 그렇겠죠.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장면이나 에피소드들의 효과도 상당히 독특합니다. 일반적으로 이야기라는 예술 장르 안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사건이나 갈등, 이런 건 아무것도 없어요. 밍이 겪는 최대 위기라고 해야 고작 비를 맞는다거나, 스프레이로 그래피티를 그리다가 경찰을 피해 도망가는 정도지요.
영화는 중간중간, 선문답들을 끼워 넣습니다. 여러 문제들을 화두로 결국 사람들의 삶과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질문을 던지죠. 어떻게 한 세상을 살 것인가에 대한. 하지만 정답은 관객 각자의 몫입니다. 이런 테마적인 요소들은 거의 의무수행 식인데, 그게 그리 어색하지는 않아요. 여행과 이런 종류의 철학적인 질문은 늘 따라다니니까요.
영화는 생각보다 편안하게 즐길 수 있어요. 어떤 느낌이냐, 하면, 별로 친하지 않은 친구네 놀러갔다가 어색함을 줄이기 위해 사진 앨범을 뒤적이며,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사진을 보고 낄낄거리면서 그들이 살았던 삶을 상상하는 느낌과 비슷하죠. 아니면 예쁜 그림책을 훌훌 넘길 때의 느낌과 비슷하기도 하고요. 예, 맞아요. 이 영화는 참 예쁩니다. 사람들도, 자연도, 화면도, 영화의 전체적인 느낌이 아주 예뻐요.
줄거리와 이야기, 갈등과 사건, 반전 같은 영화적 장치들에 중독됐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영화를 즐겼다니, 아직은 다행이고 놀라운 거죠. 우리가 소비하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휴식이 아닌 불필요한 자극을 주는 게 아닐까, 그런 염려가 가끔 들 때가 있어요. 이런 영화는 우리에게 진정한 휴식 같은 영화입니다.
사족.
거의 대부분의 배우들이 이 영화가 데뷔작이거나, 감독의 설득에 못 이겨 한 번 카메라 앞에 서 본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들의 연기가 더 예쁘고 자연스러울 수 있었을 것 같아요. 감독이 지시를 하건, 눈앞에서 카메라가 겁을 주건, 못 먹어도 고! 였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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