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야구 선수였던 벤과 미키는 무언가로부터 쫓기고 있습니다. 주변에 사람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고, 그나마 몇 되지 않는 생존자은 뿔뿔이 흩어져 버린 것 같아요. 그래도 두 사람은 운이 좋은 편인지, 굶지도 않고 자동차도 주워 타고 다니고 행색도 그런대로 좋은 편입니다. 그렇게 10분 정도가 지나면 이야기의 상황이 대강 그려집니다. 두 남자 앞에 좀비들이 나타나거든요.
‘호러(horror)’라는 장르의 많은 재료들이 그렇듯, 좀비(zombie)는 철학적인 소재입니다. 부두(voodoo) 문화에서 비롯된 그것은 (사전적인 의미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색케 만드니까요.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삶이라는 좀비의 특질은 헐리웃으로 넘어오면서도 그대로 사용되다가 조지 로메로 감독의 68년 作, ‘Night of the Living Dead’에서부터 요즘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세기말적인 배경도 합세해서 본격적인 호러 소재로(가끔 코미디에도 등장하긴 하지만) 사용되기 시작했죠. 그것들은 최근 들어 더 강하고, 더 빨라지고, 더 추하고, 더 굶주려 있고, 더 위협적이고 더 무서운 존재가 되어왔습니다.
이 영화의 좀비는 어떠냐 하면, 고전적인 좀비와 현대의 좀비를 적당히 섞어 놓은 모습입니다. 역시 위험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조심스럽게 피하고 잘 대처할 수만 있다면 그럭저럭 괜찮아 보여요. 이 영화 속 좀비들의 이런 특성들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 영화의 본격적인 목표는 호러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필요 이상으로 무서울 필요는 없죠. 그냥 배경으로서만 존재하면 되는 거예요.
영화는 좀비가 출현한 과정과, 벤과 미키가 대변하는 평범한 일상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그 대신에 이 영화는 외로움과 타협이 불가능한 외부 세상과 싸우는 두 인물의 모습에 집중해요. 벤과 미키가 영화 내내 싸우는 대상은 좀비가 아니라 둘만 남겨두고 사라져버린 세상과 바로 자기 자신인 거죠. 두 사람에게는 다른 생존자들조차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두 남자를 돕기를 거부하고 총을 쏘고 길거리에 내던지죠.
전체적으로 영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은유이면서 잔인한 동화처럼 읽힙니다. 이 건조하고 삭막한 세상을 그나마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죠. 그건 아마도 지금 어깨를 맞댄 옆 사람에 대한 믿음이고 의리고 사랑이 아닐까요. 하지만 영화의 엔딩은 그런 희망마저 뒤엎습니다. 진짜? 그게 전부일까? 이런 조롱이 들리는 것 같아요. 참 짓궂죠. 이렇듯 영화는 시큼하고 씁쓸한 여운을 남깁니다. 믿기는 싫지만 현실이 딱 그 정도라는 것을 관객들은 거의 알고 있습니다. 좀비들이 천지로 깔린 세상과 다름없죠. 암울한 영화입니다.
인물 개발이 무척 잘 된 영화입니다. 개성도 강하고 이야기에 기여하는 역할이 분명해요. 사실 캐릭터가 이야기 자체라고 할 수 있어요.
두 명의 주연 배우와 감독은 거의 신인입니다. 저예산에 군더더기 없이, 알뜰하고 날렵하게 찍었으면서도 묵직한 목소리로 할 말은 하는 영화였어요. 이런 영화, 오랜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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