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소도시에 살던 공주란 아이가 서울의 한 고등학교로 전학을 옵니다. 잔뜩 주눅이 든 모습이며, 부모님도 없이 옛 선생님의 모친 집에 숨듯이 사는 것이며, 자기 전화 말고는 일절 핸드폰을 받지 말라는 선생님의 당부하며, 어떤 비밀이나 사연이 있는 아이라는 것을 관객들은 짐작할 수 있어요. 마음을 꽁꽁 묶어놓은 것 같던 공주는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고 수영을 열심히 배우는 등 일상에 적응을 하지만 과거로부터의 모종의 그림자는 언제나 그 아이에게 그늘을 드리웁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관객들은 공주에게 일어난 끔찍한 과거의 실체를 마주하게 되죠.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한 이 영화의 가장 큰 목적은 파렴치한 범죄를 고발하는 일입니다. 영화 속의 악당들은 ‘파렴치하다’는 표현의 정도를 훨씬 웃돌죠. 영화를 보고 있으면 영화 속으로 달려 들어가 팔을 걷어붙이고 공주를 위해 싸우고 싶은 마음이 솟구칩니다.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그런 분노에 동참하게 만들어, 과연 폭력과 아무 상관이 없이 살아온 어린 여자아이를 세상이 이렇게 대해도 되는지 묻습니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목적은 성폭행의 피해자를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장 최근의 ‘소원’이나 ‘돈 크라이 마미’, ‘시’ 같은 영화들보다도 영화의 소재를 다루는 방법은 이례적이고 보다 직접적입니다. 영화는 성폭행이란 범죄 자체보다, 그 피해자인 어린 소녀에게 더 큰 비중을 두고 그 캐릭터를 보여주는 것에 더 많은 노력을 하고 있거든요.
뉴스나 신문 지상에서 이런 부류의 사건 보도들을 접할 때, 우리가 갖게 되는 피해자에 대한 감정이나 인식은 여전히 피상적이고 관습적입니다. 그들은 흉악범의 대척점에 놓인 피해자이지만, 짐승 못지않은 가해자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사람들은 그들을 타자화(他者化)해버리기 쉬워요. 우리들은 그들 또한 우리와 마찬가지의 삶을 영위하며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며, 그렇게 만난 작고 행복한 순간에 웃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가끔 잊고 마는 거죠.
영화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의 습관적인 사고와 인식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가 그들에게 무신경하게 달아준 단순한 ‘성폭행 피해자’라는 이름표가 그들에게 다른 형태의 폭력을 휘두르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해서 말이에요. 습관적인 사고에는 감정이 배제되기 쉽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 감정 또한 습관적이기 쉽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그것 또한 그들에게 상처가 될 가능성도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영화는 우리들의 그런 무책임한, 그래서 위험할 수 있는 습관적인 사고를 공주의 일상을 찬찬히 짚어가면서 일깨워줍니다. 영화 속의 공주는 수줍고 조심성 많으며 예의 바르며 사려 깊은, 우리 주위의 여느 여고생들과 다름없어요. 그 아이가 당한 끔찍한 사건을 빼면요.
영화가 다루는 무겁고 넌덜머리날 정도로 끔찍한 현실과는 달리, 그 안에서 보이는 공주의 일상은 아기자기하고 예쁩니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는 과정이나 선생님의 어머니의 마음을 천천히 열리게 만드는 공주를 보고 있으면, 왜 그런 일이 하필 이런 아이에게 일어났는지 세상이 미워지죠.
이런 공분은 최근의 ‘세월호 참사’로 자연스럽게 옮아갑니다. 이 영화가 공주라는 아이를 통해 들려주는 이야기와 ‘세월호 참사’를 보는 세인들의 시각에 공통점이 많거든요. 겁에 질린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나약한 어른들, 약자들의 편이 되어 주지 못하는 법과 시스템, 피해자를 가해자로 취급하는 권력의 아이러니, 이런 부조리하고 이기적이며 기회주의로 가득한 믿음이 없는 사회는 어떤 가망조차 없어 보입니다. 참담한 이야기 안에 묵직한 주제를 담아낸 영화라 불편한 감상을 남기지만, 이 험악한 시기를 살아내는 사람들이라면 가슴에 담아두어야 할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사족.
웃기고 말이 안 되는 것은 이 영화가 청소년 관람 불가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이야기에 가장 귀를 기울여야 할 대상이 이 영화를 못 본다니, 이 또한 시스템의 엄연한 폭력이고 관객들의 ‘볼 권리’가 침해당하고 있다는 좋은 예인 거죠.
우리가 지금, 이런 세상에 살고 있답니다. 어처구니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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