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콜하스의 선택 (2014) 





16세기의 유럽. 말(馬) 상인인 미하엘 콜하스는 말을 팔러 도시로 가다가 항상 다니던 길에 통행료를 내라는 요구에 당황합니다. 늘 다니던 길인데 느닷없이 통행료라니요. 미하엘은 일단 통행료 지불을 나중으로 미루고 대신 자신이 아끼는 말 두 필과 충성스러운 하인을 남겨둡니다.
하지만 나중에 외상을 갚으러 가보니 말들은 노역에 시달려 상태가 엉망인데다가, 상대방 측에 항의하던 하인은 귀족의 하수인들이 풀어놓은 개에게 물리고 뜯겨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것을 보고 분노합니다. 게다가 알고 보니, 그 통행료라는 것도 새로 온 귀족이 수세를 불리기 위해 제멋대로 부과한 것이었죠. 부당함에 미하엘은 법에 호소하려고 들지만, 그 귀족에겐 왕정에 든든한 빽이 있어 그조차도 여의치 않습니다. 결국 미하엘은 왕궁에 직접 자신이 겪은 억울함을 알리는 편지를 적어 아내 편으로 보내지만, 부질없게도 아내는 초죽음 상태도 실려옵니다. 결국 아내가 죽자 분노에 사로잡힌 미하엘은 스스로가 복수의 칼을 듭니다.
‘정의’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영화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인 주제보다, ‘정의는 언제나 공평하다’는 명제에 집중합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정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미하엘은 자신이 당한 ‘부정(不正)’에 대해 칼을 들고 ‘정의’라는 명분 아래 복수를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이 행한 살육으로 ‘부정’의 덫에 걸리고 맙니다.
스스로 행한 살육과 폭동의 결과로 미하엘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법의 테두리 안에서 보상을 받지만 도덕이라는 문제가 남습니다. 그는 자신의 도덕적인 기준에 따라 행동했지만 그에겐 책임의 문제가 따릅니다. ‘정의’는 미하엘에게 도덕적인 책임을 물으며 그의 목숨을 요구합니다. 아이러니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이것이 현실이고, 이야기 안에서는 당연한 결말일 수도 있겠죠.
주제 의식이 매우 분명한 영화입니다. ‘신의 물레방아는 천천히 돌지만 모든 곡식을 골고루 빻는다’라는 성경 구절을 이야기로 보여준 느낌이죠. 단순히 억울한 남자의 정의로운 복수담이 목표인 영화는 아닌 거죠.
아이러니하게도 이야기 속의 ‘정의’는 누군가에게 생채기를 남기는 ‘천사의 날개짓’ 같습니다. 동전의 양면 같은 거죠. 그래서 영화 속의 인물들은 모두 악인으로 보입니다. 주인공은 있지만 시종일관 선한 사람은 없는 거죠. 그런 인물들로 영화는 한눈을 팔지 않고 복수와 응징의 과정을 그려내지만 그 흔한 권선징악의 결말을 이끌어내지는 않습니다.
이쯤 되면 테마에 매달려 작정하고 만든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보통 이렇게 강렬한 주제의식에 매달리는 영화들 안에서 인물들은 그저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나 꼭두각시처럼 그려지기 쉬운데, 이 영화는 그런 점에서 매우 잘 한 것 같아요. 인물들의 감정은 절절하고 행동들은 극적 상황에 매우 적절하죠. 예를 들어, 주인공 부부의 격렬한 베드신이나 곧 처형당할 운명의 아빠와 작별을 고하는 딸의 태도를 보세요. 그 이면엔 평범한 영화들이 놓치는 많은 감정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감상의 몫으로 챙겨가는 것도 이 영화의 묘미라고 할 수 있어요.
다시 이 영화의 주제로 돌아가면, 아무도 보장해 주지 않는 개인의 정의는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미하엘이 단순한 범죄자냐 억울한 희생양이냐는 이 영화의 원작이 된 소설이 쓰인 이래로 계속되는 질문일 겁니다. 미하엘처럼 행동하면 도덕적인 책임이 따를 것이고, 그렇다고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머무르며 현실과 타협하자면 지나치게 안일해 보일 수도 있겠고요. 영화의 원작은 이백년도 전에 쓰인 독일의 고전이지만 당시의 그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크게, 혹은 사소하게 미하엘과 비슷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들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사족;
솔직히 이 영화의 결말이 마음에 안 들어요. ‘정의’에 접근하는 방식이 오늘날엔 많이 달라져야 하지 않나요. 미하엘 콜하스는 눈먼 권력이 휘두른 폭력의 희생자였어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더 기가 차는 건, 이백년 전의 독일과 이백년 후의 우리나라가 똑같다는 거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어쩌면 이 영화의 주제와는 대립되는 말일 수도 있어요. 저라면 차라리 이 영화가 보여준 ‘정의의 물레방아’보다 ‘눈에는 눈’을 택하겠어요. ‘눈에는 눈과 이’도 모자라 손톱까지 동원한다면 더 좋겠죠. 그럼 페어플레이가 아닐라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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