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슬픔
서로의 등만 바라봐야 하는 세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은서, 완, 세. 어릴 적 동네 친구죠.
세 사람은 기억도, 감정도 서로에게, 서로에 의해 얽혀 있습니다. 은서는 완을 좋아하지만 완은 은서에게 관심이 없어 보여요. 그런 은서를 세가 좋아하지만 은서의 마음은 온통 완에게 가 있지요. 소설 중반쯤에 이르면 완의 결혼으로 상심한 은서는 세와 결혼하지만 세 사람의 불행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는 독파하기가 힘들었던 소설입니다. 읽으면서 내내 덮었다 다시 들췄다 반복했던 책이었어요. 감정 소비가 너무 심해,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땐 쾌감까지 느껴질 정도였으니까요.
신경숙의 장편 데뷔인 이 작품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결국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까요. 작가는 자신에 대한 진정한 애정과 성찰 없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말합니다.
소설 속 인물들의 의식은 외부로 향해 있어, 정작 이미 자신을 향해 있는 시선, 이미 자신에게 열려 있는 마음을 외면합니다. 그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누군가를 다치게 하지만, 그 상처는 고스란히 자신들의 몫이 되고 말죠. 이들이 결국 불행해지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입니다.
작가는 슬픈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인물들을 아주 잔인한 결말로 이끕니다. 그 여정이 즐겁지만은 않지만 작가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에는 끔찍이도 치열함과 수줍은 설렘, 날 선 깨달음과 낯선 두근거림이 공존합니다. 감정의 디테일이나 꽤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들도 많이 포진되어 있고요. 그것이 이 작품을 끝까지 읽게 만드는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사랑도 정치라고 합니다. 권력이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결말에 이를수록 점점 악마가 되어가는 세를 보면서 끔찍하다는 생각보다는 측은지심이 들었던 것은 그 때문일 겁니다. 세 명의 인물 중, 권력을 갖지 못한 유일한 사람은 바로 ‘세’입니다. 그는 사랑을 이룬 후에도 안절부절못해요. 간절한 마음으로 성취한 보답은 너무 보잘 것 없어서 세는 언제나 불안합니다. 결국 불행한 결말에 원인을 제공하기는 하지만, 어떻게 보면 사랑이라는 권력 싸움에서 가장 큰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작가는 은서에게 많은 지면을 할애했지만, 정작 감정이 가장 쉽게 이입되는 대상은 ‘세’라는 인물이었어요. ‘세’는 이 작품 안에서 명백한 희생양입니다.
반면, ‘은서’는 독자로서 접근하기 가장 힘든 인물이었어요. 이 사람의 감정엔 공감하면서 행동엔 동의할 수 없는 거죠. 호흡이 긴 작가의 문장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냥 지쳐요. 사람이 다 똑같을 수 없듯이 이야기 속의 설정이 그러니 어쩔 수 없는 거겠지만요.
우리들은 항상 우리가 갖고 있지 못한 것을 갈구합니다. 불행과 마음의 전쟁은 그런 욕심에서 비롯되죠. 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가요.
욕망은 끝이 없고 그 경계를 자꾸만 넓혀가는 괴물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우리 모두 사랑을 원하지만 정작 사랑 앞에서는 비열해지거나 가면을 쓰기 쉽습니다. 계산하고 따지고 솔직하지 못 할 때가 많지요. 개인적으로 온전히 텅 빈 마음으로 사랑을 주고받는 것은 말만큼 쉽지 않을 때가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쓸쓸한 겨울 초입에 괜히 읽었다고 생각되는 책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름의 깨달음도 있었겠죠. 물론 사랑 앞에 선다면 여전히 어눌하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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