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이라는 여자가 전에 일했던 어학원에 들르자, 자신 편으로 온 편지 다발을 전달받습니다. 발신자는 일본인 ‘모리’. 과거에 모리는 권에게 프러포즈를 했으나 확답을 받지 못한 채 한국을 떠났고, 권을 그리워하며 보냈던 모리의 편지들을 요양차 직장을 그만뒀던 권이 그제야 손에 넣게 된 거죠. 모리의 편지를 읽던 권은 그만 실수로 편지 다발을 놓치고 말아, 모리의 편지들은 순서가 뒤죽박죽이 되어 버립니다.
영화의 대부분은 권의 부재중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모리가 권을 기다렸던 이 주 동안의 일들을 플래시백으로 담아내는데, 편지와 마찬가지로 순서 없이, 마구잡이로 관객들에게 던져집니다. 권이 편지를 놓치는 행동은 이런 구성을 위한 일종의 ‘구실’인 셈이죠.
영화는 관객들에게 앞뒤가 섞인 모리의 일상들을 한 그림으로 붙여나갈 것을 요구하지만,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엄청난 집중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죠. 한데 모인 전체 그림이 엄청난 비밀이나 반전을 품고 있는 것도 아니니, 관객들은 대체 왜 저런 플롯을 짜낸 걸까, 의아할 수도 있습니다.
그저 감독은 자신이 만들고 있는 영화를 가지고 재미있는 장난(어쩌면 실험)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귀여워요. 이런 영화적인 트릭(거창한 표현이지만)은 영화와도 잘 어울리고요. 밋밋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에 약간의 활력을 부여하는 효과를 줍니다.
‘밋밋하기 짝이 없다’는 표현을 했지만, 그것이 홍상수 영화의 특징이니 그 말을 칭찬으로 삼아야겠습니다. 다른 영화에서라면 듣기 싫을 수도 있는 말을 자신의 특징으로 삼은 감독의 고집은 거의 일관되게 보입니다.
홍상수의 영화들은 ‘관음증’ 운운하는 영화의 역학을 정의하는 명제에 충실합니다. 드라마틱한 일이라고는 별로 없는, 나른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몰래 들이대고 있는 느낌입니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예요.
영화는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도 같습니다. 모리가 묵고 있는 게스트 하우스를 배경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등퇴장을 반복하며 모리의 하루를 엮어냅니다.
인물들 개개인에겐 자세한 내막 같은 것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등장인물’들이죠. 심지어 중요인물인 ‘권’은 이름도 없이 그냥 ‘권’입니다. 영선은 왜 애인과 사이가 좋지 않은 건지, 가출한 아가씨는 왜 그리 싸가지인지 등등, 이런저런 설명이 거의 없어요. 이들이 뱉어내는 대사들은 행간의 의미를 유추하기엔 단서가 별로 없습니다. 영화의 로맨틱한 감정도 그냥 멜로드라마의 피상적인 부산물에 지나지 않아요. 영화는 남겨둔 여백이 많긴 하지만, 평범한 관객으로서 그것에 개입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요. 그렇다고 무척 어려운 영화도 아닌데 말이죠.
하지만 이런 불평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요. 감독도 이런 지적이 지겨울 겁니다. 영화를 처음 만드는 사람도 아니고, 이런저런 말들을 여러 번 들었을 테니까요. 그냥 그렇다고요.
러닝타임이 한 시간을 겨우 넘습니다. 관객으로서 욕심이 있다면 시간을 좀 더 들여 인물들의 이야기들을 좀 더 풀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만, 그건 순전히 개인적인 바람일 뿐이죠.
지극히 평범한 캐릭터에 단순한 이야기, 특별할 것 없는 대사가 빚어내는 밍숭맹숭한 느낌은 홍상수의 영화가 호불호의 극단을 달리는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만 가끔 이런 영화도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자극적인 온갖 양념을 한 산해진미에 물릴 때, 최소한의 양념으로만 맛을 낸 단순한 요리가 오히려 입에 붙는 것과 마찬가지죠. 이 영화의 느낌이 딱 그래요. 살짝 데쳐 약간의 들기름과 국간장만으로 섬섬히 무쳐낸 나물 같죠. 홍상수의 골수 팬들은 그런 느낌에 홀릭된 사람들일 거라고 감히 생각해요.
사족입니다만, 영화의 내용이 모두 모리가 권에게 보냈던 편지에 적었던 것들이라면, 모리는 자신이 영선과 동침했다는 사실도 권에게 편지로 고백했던 걸까요? 두 사람이 해결할 문제지만 전 은근히 신경이 쓰이더라고요.
그리고 마지막 불평.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영어들을 잘 해요. 심지어 제 분에 못 이겨 내뱉는 욕까지도 영어로 하더군요. 어쩌면 그럴 수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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