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주와 기웅은 중학교 동창으로 꽤 친했던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고는 관계가 소원해졌어요. 용주는 내신 1등급에 서울대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기웅은 또래 주먹 집단에서 대장 노릇을 하고 있지요.
용주는 기웅의 언저리를 맴돌며 예전의 관계를 그리워하지만 용주에겐 말 못할 고민이 있습니다. 사실 용주는 기웅을 짝사랑하고 있었거든요.
영화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청소년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싶고, 학교 폭력도 말하고 싶고, 성적만 좋으면 모든 게 용서되는(용주에겐 그렇지 않지만) 이 나라 교육 현실도 고발하고 싶고, 어른들의 무관심으로 피폐해져가는 이 나라 아이들의 고단한 현실도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영화는 이런 많은 소재에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있지만, 결과물로서의 이 영화는 보기에 좋습니다. 비교적 정리가 잘 되어 있는 편이에요.
영화 속의 많은 문제 제기는 한 인물, 용주로 집중됩니다. 용주는 그 자신이 동성애자이고, 또한 자신의 우수한 성적이 학교 폭력에 무관심해도 괜찮다는 핑계가 된다는 것을 몸소 경험하고, 왕따와 폭력에 시달리는 기태를 위함으로서 그것에 반발합니다. 하지만 용주가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교내에 돌기 시작하면서부터 용주 스스로가 폭력의 피해자가 됩니다. 이런 변화는 기웅의 태도에 변화를 불러옵니다.
영화는 롤러코스터 같습니다. 천천히 출발하여 느긋하게 경사를 오르다가 클라이맥스를 거치고 아찔한 내리막을 타면서 관객의 감정을 휘몰아치죠. 영화 초반의 건조할 정도의 거리감은 계산된 것처럼 보입니다. 초반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감정에 무관심해 보여, 자칫 불친절한 영화처럼 보이지만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눈앞의 사건들과 자신들의 사정에 적극적으로 반응합니다. 이들이 내보인 내면의 속살은 관객을 완전히 이입시켜요.
용주의 감정은 절절하고, 시종일관 포커페이스로 일관했던 기웅도 자신의 아픔을 드러냅니다. 용주의 위기를 자신의 탈출구로 삼은 기택은 관객들의 공분을 사 마땅하지만 그 나약한 내면은 오히려 동정을 사기에 마땅하죠.
영화 속 인물들이 겪는 사건들은 서로에게 얽혀 있어 그 갈등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엎치락뒤치락하는 모습들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지금 처한 세계의 작은 축소판 같아요.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거부당하며, 어디선가 사회적 암묵 속에 백주에 범죄가 자행되죠. 사람들은 성취에만 매달리는 나머지 서로에게 무관심하기 일쑤고, 다양성은 인정하지 않으려 하며, 억눌린 피해자들은 가해자로서 또 다른 피해자들을 양산하죠. 이기적인 괴물이 들끓는 이 사회에서 이런 문제들은 시스템 탓이라고들 하지만 적어도 우리 아이들만큼은 그런 괴물이 되는 것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것은 우리 어른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해요.
이송희일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단순히 ‘게이 로맨스’를 담아내기 위한 그릇은 아닙니다. 감독은 게이 캐릭터를 이용해서 오히려 개인과 사회의 부조리한 단면들을 고발하고 싶었을 겁니다. 이송희일 감독의 영화는 그래서 무겁습니다. 이 영화도 예외는 아니에요. 10대의 학생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질척거리는 느낌은 상당하죠. 그의 히트작 ‘후회하지 않아’에 버금갈 정도에요. ‘음습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좋을 이 영화가 그나마의 희망을 보이는 것은 엔딩입니다. 축축하고 질척한 진흙 속에 예쁜 꽃을 피워낼 씨앗을 품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사족
1. 어느 순간 들렸다가 느닷없이 사라지는 영화 음악은 약간 불만이었습니다. 음악 자체는 괜찮았지만요. 그리고 대사 전달에도 약간 문제가 있는 것 같았어요. 이건 연기력 탓인지, 사운드 탓인지 모르겠어요.
2. 엔딩에 대해서.
약간 냉정하게 보자면, 이 영화의 엔딩이 그저 ‘게이 로맨스’의 판타지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서 말이죠. 결말이 영화 전체에서 약간 튄다고 할까요. 솔직히 말해서 용주가 기웅에게 원한 것은 사랑이었지 우정이 아니니까요. 기웅은 아무리 용을 써도 용주를 사랑할 수는 없는 거고요. 그는 다만 진정한 친구가 필요했던 거니까.
그냥 이런 식으로 유야무야 끝을 맺는 것은 동성애자들의 섹스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는 ‘야오이녀’들의 시선을 닮아 있는 것 같아서요. 물론 잘 생긴 남자 둘이 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침대 위에 걸터앉은 엔딩은 충분히 아름답지만요.
3. 이송희일 감독이 ‘제목 따라하기’에 집착을 갖는 이유가 뭘까요. ‘백야’도 그랬고, ‘지난여름 갑자기’도 그랬고, 이번 영화도요. 나름의 오마주라고 생각은 하는데, 진짜 이유가 따로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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