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가 1946년 발표한 <할로 저택의 비극 (The Hollow)>은 출간으로부터 몇 년 후 <Murder After Hours>라는 제목의 연극으로 작가 본인에 의해 각색되어 연극으로서도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둔 작품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엔 연극적인 요소들이 상당히 강합니다. 크리스티의 소설 중에서도 그 성격이 분명하죠.
사건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할로 저택’, 특히 살인 사건 현장인 수영장은 흡사 연극 무대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습니다. 소설 기저에 흐르는 동화 같은 분위기는 아마 이런 공간이 주는 작위성 탓일 거라 생각되죠. 하지만 ‘존 크리스토’를 사이에 둔 세 여자의 멜로드라마는 특이한 관계 설정과 그 세밀한 심리 묘사로 독자들은 박진성 있는 현실감을 경험합니다. 특히 지나치다 싶은 이 작품의 멜로드라마적인 성격은 그 주요 플롯 외에도 서브 플롯으로 전개되는 ‘에드워드’와 ‘미지’의 로맨스조차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합니다. 사실, 이 작품의 멜로드라마적인 속성은 오늘날 TV 드라마를 방불케 할 정도죠. 삼각관계도 아닌 사각 관계의 로맨스, 살인이라는 범죄, 비밀을 공유하는 음모자들, 보통 사람들의 속물근성을 묘하게 자극하는 등장인물 등등이 그런데, 이런 요소들은 이 작품에 풍성한 드라마를 선사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추리소설 같지 않은 추리소설이라는 것입니다. 크리스티 작품들의 이런 경향은 특히 작가의 후기작일수록 강해지는데, 이 작품이 발표된 40년대는 작가가 그런 스타일의 소설 집필에 도전했던 시기로 짐작됩니다.
1920년, <스타일즈 저택의 괴사건(a Mysterious Affair at Styles)>으로 데뷔한 이래 30년대까지 작가는 줄곧 자신의 주된 종목이었던 트릭 위주의 ‘후던잇(Whodunit)’들을 발표했었죠. 하지만 40년대에 접어들면서 작가는 자신의 장기에 머무르는 한편 일반소설적인(멜로드라마적인 요소들이 특히 강한) 작품들을 번갈아 가며 발표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티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 작품을 언급하면서 명탐정 ‘포와로(Poirot)’를 등장시킨 것에 대해 후회를 밝힌 사실은, 아마도 자신의 소설 스타일에 변화를 주고픈 작가적 욕망을 드러낸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크리스티는 역시 크리스티. 애거서 크리스티가 쓴 소설들이 다른 작가의 작품들이 될 수는 없죠. 심지어 ‘메어리 웨스트마콧(Mary Westmacott)’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소설들에서도 추리소설의 냄새가 나는 것 처럼요. 이 소설 역시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역시 애거서 크리스티’라는 감탄이 저절로 흘러나오게 됩니다.
첫 장을 넘기면 도입부를 구성하는 데에 있어서 작가가 즐겨 사용하는 공식대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등장인물들이 소개되고 주말을 즐기러 할로 저택으로 그들이 모여드는데 그 중엔 위에도 언급한 존 크리스토 부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존의 부인 ‘저다’는 타고난 어리석음으로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여자고 집주인인 ‘레이디 루시 앙카텔’의 먼 친척인 ‘헨리에타’와 존은 공공연한 연인관계였지요. 거기다가 주말이 시작되는 첫날밤에는 존의 옛 애인인 ‘베로니카’가 불현듯 모습을 나타내어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존 크리스토 의사를 중심으로 한 세 여자의 사각 관계의 로맨스는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소재이면서 줄거리의 전부이기도 합니다. 네 사람은 사랑하면서 사랑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 서로를 원하고 시기하고 질투하죠.
과거에 존은 베로니카를 정말 미치도록 사랑했지만 그녀의 지나치게 강한 소유욕과 여배우로서의 자존심에 질려 베로니카에게 결별을 선고했었죠. 그 후 보다 유순한 저다를 선택하고 결혼하지만 그 결혼엔 사랑은 없었습니다. 정작 존이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은 조각가인 헨리에타지만 그녀에 대한 존의 감정은 사랑이라기보다 엄마 품을 찾는 아이 같은 면모가 강합니다. 그러면서 결말에 가서는 존이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은 바로 저다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는데, 독자로서 본인이 보기에는 그건 사랑이라기보다 걱정과 우려의 느낌이 더 강한 감정입니다. 혼자 남겨질 자식을 걱정하는 늙은 부모의 마음 같다고나 할까요.
반면 저다는 남편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거의 ‘숭배’에 가깝습니다. 그 숭배의 대상이 지극히 인간적인,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추하고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자 그 우러름의 감정은 보기 좋게 배반당하죠. 저다의 이런 심리 변화는 이 작품 속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인데, 무척 설득력 있게 묘사되어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처연한 슬픔’은 자신의 믿음에 배반당하는 저다의 운명과 관련이 있지요.
존에 대한 헨리에타의 감정은 약간 애매합니다. 시종일관 열정적인 존에 대해 냉정한 태도로 일관했던 헨리에타의 태도는 지적(知的) 동료, 내지는 진심어린 경청자(敬聽者)처럼 보입니다. 자신의 직업에 대한 존의 열정을 고스란히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헨리에타의 감정은 결말에 가서야 그 정체가 밝혀지는데, 여성 편력이 강했던 존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가 바로 헨리에타였다는 사실은 은근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합니다.
여배우로서 돈과 명예를 한 손에 거머쥔 베로니카에게 있어 제 인생에 유일한 실패라고는 사랑이었습니다. 일개 의사에 지나지 않는 존에게서의 결별은 베로니카의 자존심에 깊은 생채기를 남깁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사랑과 그에 대한 상처를 보상받기 위해 다시 존의 앞에 서지만 요지부동하게 냉정한 그의 반응에 베로니카는 다시 한 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지요. 베로니카는 애증으로 똘똘 뭉쳐진 사랑의 화신이며 복수의 여신이 됩니다.
이들 네 사람의 감정은 지나치게 극화된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작가는 그 탁월한 솜씨로 그 심리들을 섬세하게 풀어내며 인물들을 흥미롭게 무대에 올립니다. 이들의 애정의 미묘한 파도타기는 급기야 살인으로 이어지고, 포와로가 등장하며 그제야 본격적인 추리소설의 형태를 띠게 되지요. 살인의 동기와 그 기회를 가진 용의자들이 나타나고 하찮은 듯 보이지만 포와로의 눈에는 결정적인 단서가 나열됩니다.
사실,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이 작품은 분명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추리소설로서의 별다른 특색은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허점이 많죠. 단서는 불충분하고 포와로의 수사는 거의 그렇듯이 자기중심적인데다가 지나치게 심리 분석(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다는 식)에 의존하며 범인이 밝혀지는 과정엔 비약이 심한 편이죠. 하지만 주목할 것은 작가가 범인을 숨기는 방법입니다. 추리소설의 필수 요소인 ‘의의의 결말’을 위해 범인이 밝혀지는 마지막엔 놀랄만한 반전이 등장하는데, 크리스티는 ‘가장 살인자 같지 않은 범인’을 만들어내기 위해 그 상황에 인물들이 만든 편견을 이용합니다. 작가는 그들의 고정관념을 뒤엎었다가 결말에 가서는 다시 한 번 역전시키는데, 이런 방법은 살짝 변형되긴 했지만 미스 제인 마플(Miss Jane Marple)의 데뷔작인 30년 작, <목사관 살인사건(The Murder at the Vicarage)>에서도 보입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이 작품엔 ‘선의의 음모자’들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암암리에 연대하여 수사에 혼선을 줍니다. 그건 살인자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는데, 정작 범인 자신은 그런 의도를 전혀 몰랐었고 그들이 미리 그런 계획을 세운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우연에 의한 공모자’라고도 할 수 있죠.
하지만 이런 추리소설적인 요소들보다 살인을 소재로 하면서도 그것을 단순히 범죄의 영역에 두지 않고 인간성을 관찰하고 사랑이라는 감정의 이면을 탐색하려는 수단으로 삼는 작가적인 노력, 짜임새 있는 드라마와 다양한 성격과 풍부한 감정의 인물들이 엮어내는 아기자기한 재미 등, 일반 소설을 대하는 재미가 더 많은 것이 이 작품의 매력입니다.
크리스티의 성공작이긴 하지만, 작가의 대표작도 아니고 독자들에게도 그리 인기가 많은 작품은 아닙니다. 그건 아마도 작가의 장기인 물리적인 트릭, 심리적인 맹점을 노리는 플롯 구성 같은 부분에 더 큰 매력을 느끼는 독자들이 많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독자들에게는 다소 지루한 소설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잊을 수 없는 죽음(Remembered Death, 45년 작)>이나 <파도를 타고 (Taken the Flood, 48년 작)>, 작가의 후기 대표작인 <버트램 호텔에서 (At Bertram's Hotel, 65년 작)>, <끝없는 밤 (Endless Night, 67년 작)> 같은 작품을 좋아한다면 이 소설 역시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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