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가(家)의 사람들은 직업이 없거나 게으른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둘째인 ‘고든 클로드’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아왔습니다. 미혼이면서 갑부인 고든은 형제들과 그 가족들에게 항상 경제적으로 든든한 울타리이자 지원군이여 왔지요. 그러던 고든이 ‘로절린’이라는 딸 같은 여자와 갑작스러운 결혼을 하고 영국으로 돌아온 지 이틀 만에 독일군의 공습(때는 2차 세계대전)으로 죽고 맙니다. 유언장도 없는 상태에서 고든의 전 재산은 현재 부인인 로절린에게 상속되고 로절린은 여러모로 의심쩍은 오빠, ‘데이빗’에게 좌지우지되는 형편입니다. 클로드 가의 사람들에게 적의를 품은 데이빗은 돈줄을 움켜쥐고 클로드 가 사람들은 경제적인 공황 상태에 빠지죠.
그러던 중, 죽은 줄 알았던 로절린의 첫 번째 남편이 아직 살아 있다는 소식을 가지고 ‘이녹 아든’이는 남자가 마을에 찾아듭니다. 만약 로절린의 첫 남편이 죽지 않았다면 로절린의 결혼은 무효가 되는 것이고 고든의 재산은 다시 클로드 가의 사람들에게 돌아가게 되죠.
그런 와중에 클로드 가의 ‘린’은 데이빗과 사랑에 빠지고 이녹 아든이라고 자신을 밝혔던 남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합니다. 그건 명백한 살인이었고, 우리의 명탐정 에르큘 포와로가 수사에 뛰어듭니다.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의 시체가 발견됩니다.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의 48년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 소재로 사용된 <이녹 아든(Enoch Arden)>은 영국의 계관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의 유명한 서사시죠. 내용은 대략 이래요. 이녹 아든과 ‘애니’는 부부였는데, 어느 날 이녹 아든이 바다에 나가 돌아오질 않죠. 남편이 죽은 걸로 안 애니는 오랫동안 슬퍼하다가 자신을 옆에서 충심으로 지켜주고 위로해 주던 남편의 친구, ‘필립’과 결혼을 하게 되는데, 나중에서야 이녹 아든이 살아서 돌아옵니다. 하지만 이미 부인은 가장 친한 친구의 부인이 되어버렸고 이녹 아든은 자신의 생존을 드러내지 않은 채, 두 사람의 행복을 빌며 자살로 생을 마감하죠.
이녹 아든의 테마는 그 드라마틱한 설정으로 많은 소설과 영화에 영감을 주어왔습니다. 크리스티 자신도 <메소포타미아의 죽음 (Death in Mesopotamia, 36년 作> 등의 여러 작품에서 이 소재를 즐겨 사용했고요. 몇 년 전의 영화 <진주만 (Pearl Harbour)>이나 <캐스트어웨이 (Castaway)>의 이야기도 이 테니슨의 시를 차용했죠. 소피아 로렌의 60년대 클래식, <해바라기 (Sunflower)>도 있군요.
테니슨의 시나, 다른 영화들에서 그린 이녹 아든은 멜로드라마의 로맨틱한 순정남이었지만, 크리스티가 이 작품에서 그려낸 이녹 아든은 미스터리의 중심에 있는, 의뭉스러운 협잡꾼입니다. 이 사람의 말대로 로절린의 첫 남편은 살아 있는 걸까요. 혹시 그 이름이 상징하는 대로, 그 자신이 로절린의 첫 남편이 아닐까요.
그가 죽음으로서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은 로절린과 데이빗 남매이지만 그들에겐 명확한 알리바이가 있어요. 죽은 남자가 로절린의 첫 남편, ‘로버트 언더헤이’라고 증언한 ‘포터 소령’의 죽음은 자살이라고 쳐도, 로절린의 죽음은 명백한 살인이죠. 로절린의 죽음을 가장 바랐던 것은 바로 클로드 가의 사람들이고요. 크리스티는 동기와 혐의, 기회가 엇갈리는 일련의 죽음들 속에서 약혼자와 의문스러운 이방인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자의 심리를 곁들여 멋진 로맨틱 미스터리를 완성해 냅니다. 이 작품은 멜로드라마의 요소가 강한, 추리소설 같지 않은 추리소설의 멋진 전형이죠.
이런 작풍(作風)이 나중엔(60년대를 전후로) 작가의 전형적인 스타일이 되지만, 이 작품이 발표되던 40년대엔 작가의 전작들과 비교할 때, 약간 특이한 케이스였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45년의 <잊을 수 없는 죽음 (Remembered Death)>이나 46년의 <할로 저택의 비극 (the Hollow)>처럼 추리소설적인 면보다는 일반소설적인 면이 훨씬 강하죠. 포와로가 등장하긴 하지만 비중이 적은 편이고, 아직까지는 트릭 위주의 꼬고 뒤튼 미스터리를 주로 만들어내던 시기였으니까요. 이 책이 출판됐을 당시, 평론가들이 그다지 호평을 하지 않은 것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죠. 크리스티의 작품들 중, 비교적 평가 절하된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 작품은 크리스티의 특징을 대부분 갖고 있는 ‘전형적인’ 소설입니다. 홈 머더(Home Murder; 대가족 내의 살인) 스타일의 플롯, 잘 구축된 미스터리, 교묘하게 숨어 있다가 나중에 독자들의 의표를 찌르는 단서들, 익숙하지만 제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해내는 속임수, 잘 만들어진 캐릭터들, 그리고 작가의 은근한 유머와 멜로적인 감성, 기타 등등. 크리스티의 팬들 중에 여성 팬들이 많다는 것도 이해가 가죠. 힘이 넘치는 작품이지만 그 힘은 작품의 멜로드라마의 아기자기함에서 나오니까요.
이 작품에서 독자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중요한 트릭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Patricia Highsmith)’의 소설이면서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의 대표작이기도 한 <열차 위의 이방인 (Strangers on the Train)>이나, ‘프레드릭 브라운(Fredric Brown)’의 <교환 살인 (the Murderers)>에서도 나옵니다. 즉 각자 살인의 동기를 가진 두 인물이 서로 피해자를 바꿔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인데, 이로 인해 혐의와 기회는 있으나 동기를 전혀 찾을 수 없는 데서 발생하는 미스터리를 다룹니다. 하이스미스의 소설이나 브라운의 소설에선 두 범죄자의 공모 하에 범죄가 저질러지지만, 크리스티의 이 작품에선 우연에 의해 희생자가 바뀌죠. 그래서 정작 범인 자신도 혼란에 빠집니다.
범인조차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이 범죄를 푸는 포와로의 추리는 오히려 단순해서 명쾌합니다. 포와로의 의심은 범인의 반응이 가장 당연하고 일반적인 것이 아닌, 별스럽고 거추장스러운, 예외의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요. 물리적인 요소가 아닌 심리적인 부분, 인간 행동의 일반성에 근거한 추리를 함으로서 복잡한 사건을 시원하게 해결합니다.
또한 이 작품에서 특이한 점은, 작중 인물인 ‘린 마치몬트’를 통해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사람들이 겪는 공황(경제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인)을 잘 그려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군으로서 전쟁을 겪은 린은 전쟁이 종결되자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7년 동안 약혼 상태였던 약혼자 ‘롤리’를 비롯한 가족과 친척들뿐만이 아니었어요. 군대의 일원으로서 틀에 짜인 생활을 하던 린은 막상 종전으로 인한 평화와 자유가 주어지자 어쩔 바를 모릅니다. 이런 린의 내적 갈등을 단순히 타의성과 자의성의 문제로 연결 짓기보다는 전쟁이 남긴 폐해의 증거로 봐야할 것 같아요. 전쟁은 여러모로 인간성과 내적 질서를 파멸시키니까요. 그것도 전쟁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렇겠죠. 이런 린의 갈등은 이방인인 데이빗이 나타나면서 극대화되며 그 사랑도 위협받습니다.
이 작품에 나오는 클로드 가의 사람들이 극 중 데이빗의 말대로 ‘부자 친척에 거머리 같이 빌붙어 사는 게으른 파렴치한들’인지 의견을 나눠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 속에서 클로드 가의 사람들은 모두 직업이 있습니다. 제레미 클로드는 변호사고 라이오넬 클로드는 의사죠. 또한 롤리 클로드는 농부이고 린은 군대에 있었어요. 그들의 안주인인 프랜시스와 캐서린, 고든 클로드의 누이이면서 린의 엄마인 아델라는 직업이 없지만 전쟁 중엔 여러 봉사활동으로 무척 바쁜 생활을 했었다고 하니까 그 사람들은 충분히 제 몫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단지 부양할 가족이 없으면서 갑부인 고든 클로드의 말대로 자신들의 포부를 위해 경제적으로 그에게 의지했던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인 거죠. 그렇지만 과연 어떨까요. 그들이 실수한 걸까요?
판단하기 약간 예민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저는 그럴 수 있다고 보는 편입니다. 이루고 싶은 꿈이 있지만 입에 풀칠하고 사느라 그 꿈을 포기하는 것만큼 삶을 지치게 하는 건 없죠. 고든 클로드는 형제들의 미래가 투자 가치가 높다고 판단했고 자신의 믿음을 행동에 옮긴 사람입니다. 그게 투자든 희생이든 고든 자신이 원해서, 기껍고 즐겁게 한 일이었단 말이죠. 그렇다고 그것에 대해 형제들에게 생색냈던 사람도 아니었고요. 단지 너무 이른 죽음으로 운이 나빴던 것뿐입니다. 운이 나빴다면 남은 형제들과 친척들도 마찬가지겠죠.
그럼에도 남은 가족들이 스스로의 미래를 위해 대비를 하지 않았던 것은 다소 실수였던 것 같습니다. 만일의 경우를 위해서 자립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는 준비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약간 늦은 감이 있지만, 클로드 가의 사람들도 이 사건으로 교훈을 얻었을 테니, 약간은 달라지기를 바라봅니다. 아니면 어쩔 수 없고요. 그들은 이미 부자이니까요.
이 작품엔 범인의 알리바이를 위해 시간 차 트릭이 사용되는데, 할리 퀸과 새터드웨이트 씨가 등장하는, 제목 그대로 수수께끼 같은 단편집,<수수께끼의 할리 퀸 (the Mysterious Mr. Quin, 30년 作)>에 수록된 <하늘의 신호 (the Sing in the Sky)>에도 사용됐던 트릭입니다. ‘트릭의 재활용’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미덕 중의 하나죠.
독자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할 만한 트릭이 나옵니다. 이른바 전화를 이용해 알리바이를 속이는 트릭인데, 오늘날엔 짐작도 할 수 없는 ‘구시대적인’ 방법이죠. 그 시대엔 장거리 전화를 하려면 교환수를 통해야만 했던 시대였으니까요. 거의 70년 전에 쓰인 작품에서 이런 시대착오적인 요소들을 발견하는 것은 또 다른 흥밋거리입니다. 오늘날의 스마트 폰이 중요한 소재로 나오는 소설을 훗날의 독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까요.
이 작품은 영국에선 <There Is A Tide>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는 <Taken At The Flood>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는데, 두 제목 모두 셰익스피어의 연극, <줄리어스 시저 (Julius Caesar)>의 ‘브루터스’의 대사에 나옵니다. 원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There is a tide in the affairs of men,
which taken at the flood, leads on to fortune.
Omitted, all the voyage of their life
is bound in shallows and in miseries.
On such a full of sea are we now afloat.
And we must take the current when it serves,
or lose our ven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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