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무대는 영국, 다트무어의 작은 마을인 시타포드. 그곳의 시타포드 저택에서 어느 날 저녁 강신술 모임이 열립니다. 모인 사람은 모두 여섯 명. 시타포드 저택의 세입자 ‘윌렛’ 모녀와 그들의 초대로 그곳을 방문한 이웃들인 ‘듀크’ 씨, ‘라이크로프트’ 씨, ‘로니 가필드’, 그리고 ‘버나비’ 소령이 저녁 한 때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냅니다. 진지한 강신술보다는 심심풀이의 목적이 더 강했지만 정말 뜻밖에도 그 자리에 진짜 유령이 불려나오고(혹은 그런 것처럼 보이고) 그것은 시타포드 저택의 원래 주인이자 버나비 소령의 절친한 친구인 트레블리언 대령의 죽음을 알립니다. 게다가 그 죽음의 원인은 바로 살인!!
시타포드의 이웃 마을인 익스햄프턴의 ‘헤이즐무어 저택’에 있는 친구의 안전을 염려한 버나비 소령은 폭설로 차도 다니지 못하는 산길을 6마일이나 걸어, 드디어 유령의 경고대로, 그곳에서 둔기로 뒤통수를 맞아 죽은 친구의 시체를 발견합니다. 트레블리언 대령은 왜, 어떻게, 누구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까요.
폭설에 고립된 공간, 강신술 모임, 유령의 경고, 살인. 이런 소재들은 호러 영화에 딱 맞춤한 설정이지만 작품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유쾌합니다.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의 비교적 초기작(31년 作)으로 작가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즐길 수 있는데, 음산한 배경과 끔찍한 범죄에 거짓말을 하고 있는 인물들, 삼각관계 로맨스 등의 멜로드라마적 요소들을 잘 매치한 작품이죠.
특이한 설정으로 흡인력 강한 서두에 비해, 이야기의 구성은 평이한 편입니다. 살인이 일어나고 수사가 시작되면 용의자가 나열되지요. 드러난 단서로 독자들은 한 인물을 의심하지만 결말에 드러나는 범인은 의의의 인물입니다.
황금기의 추리소설 중에서 이런 구성 공식에서 벗어나는 작품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하지만 크리스티는 이런 클리셰가 난무하는 구성 속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발견하고 고수합니다. 그것은 바로 ‘로맨틱 미스터리’ 장르인데, 저는 그런 특징들에 ‘코미디’ 장르를 하나 더 추가하고 싶어요.
사실 크리스티가 구사하는 웃음은 코미디보다는 ‘유머’에 가깝습니다.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행간에 은밀하게 숨어있죠. 이런 요소들은 무서운 범죄와 비정한 인간성을 다루는 이야기에 유쾌한 분위기를 제공합니다. 물론 크리스티 작품들 중에 유머가 완전히 배제된 소설들(이를테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And Then There Were None, 39년 作>나 <누명 (Ordeal By Innocence, 58년 作>, <끝없는 밤 (Endless Night, 67년 作> 같은 비교적 후기작품들)도 있긴 하지만 이런 ‘로맨틱 코미디 미스터리’의 특징들은 크리스티 작품들의 성격을 규정하는 거의 완벽한 키워드로 자리매김했죠.
이 작품 역시 그런 특징들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요 용의자인 ‘제임스 피어슨’과 그의 약혼녀이자 수수께끼를 푸는 탐정 역의 ‘에밀리 트레푸시스’, 그리고 그녀와 협조하는 신문기자 ‘찰스 엔더비’가 이루는 사랑의 삼각형은, ‘범인은 누굴까’의 문제 못지않은 긴장감으로 독자들의 호기심을 붙잡습니다. 에밀리는 과연 누구를 선택하게 될까요. 우유부단한 약혼자일까요, 아니면 꾀가 많고 성공적인 신문기자일까요.
이야기가 선보이는 범죄사건 또한 다이내믹합니다. 트레블리언 대령이 죽음으로서 유산을 받기로 되어 있는 친척들과 시타포드의 이웃들 거의 모두가 의심스럽습니다. 친척들 모두는 알리바이에 구멍이 있고 분명한 동기가 있습니다. 이웃들이라고 그렇지 않을까요? 윌렛 모녀는 왜 하필 겨울나기가 힘든 그런 집을 한겨울에 대여한 걸까요. 버럭 화를 잘 내는 와이엇 대령은? 과거를 알 수 없는 비밀에 싸인 남자인 듀크씨는? 심령술에 일가견이 있다는 라이크로프트 씨는? 혹시 강신술 모임에 나타난 유령은 그의 속임수가 아니었을까요? 여기에 미지의 탈옥수가 등장함으로 이야기는 다른 국면을 맞게 됩니다. 탈옥수는 트레블리언 대령의 죽음과 모종의 관련이 있는 걸까요?
‘스키’를 이용해서 알리바이를 속인 범행 방법은 그렇게 유별나고 기가 막히는 트릭은 아니지만 독자들에게 먹힙니다. 이 작품이 출간될 당시엔 상당히 신선했을 것 같기도 하고요. 인물들의 대화들 곳곳에 숨겨져 있는 범행의 동기나 단서들을 찾아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이만하면 크리스티는 페어플레이를 했다고 할 수 있어요. 비록 추리 과정에 비약이 있고 작위적인 부분(특히 ‘장화’의 존재 같은)이 더러 발견된다고 해도 주어진 정보에 대해 별로 의심하지 않는 ‘사고의 맹점’을 이용한 작가의 솜씨는 범인이 밝혀지는 결말에서 최상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합니다. 인간의 이런, 사고의 맹정, 즉 인식 과정에 있어서의 보편적인 ‘수동성’을 이용한 작가의 트릭은 포와로가 등장하는 52년 작품, <맥긴티 부인의 죽음 (Mrs. McGuinty's Dead)에서 더욱 능란하게 발휘됩니다.
이 작품에 대해 특기할 것이 있다면, 이야기에 등장하는 탐정에 대해서입니다. 범죄를 해결하는 ‘에밀리 트레푸시스’는 크리스티의 다른 단발성 여주인공들과는 차별성을 갖는데, 외모가 뛰어나고 머리가 좋으며 용기가 출중하다는 특징은 그렇다 치고, 이 여자의 직업이 모델이라는 점이 특이합니다. <바그다드의 비밀 (They Came to Baghdad, 51년 作)>의 ‘빅토리아 존스’는 뻥쟁이 타이피스트였고, <갈색 옷을 입은 남자 (the Man in the Brown Suit, 24년 作)>의 ‘앤 베딩필드’는 고아에 무직이었으며, 시리즈의 캐릭터이지만 ‘터펜스’는 남편인 ‘토미’를 만나기 전까지 전쟁이 끝난 후, 병원에서 쫓겨난 전직 간호사였죠. 이들에 비한다면 에밀리는 당대의 엘리트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문직에 종사하고 개인 변호사까지 있는 것을 보니 재산도 많은 것 같고요. 물론 <침니즈 저택의 비밀 (the Secret of Chimneys, 26년 作)>이나 <세븐 다이얼스 미스터리 (the Seven Dials Mystery, 29년 作)>에 등장하는 ‘번들’은 약간 예외이긴 해도 이 사람은 유한계급의 귀족이었으니까 차원이 약간 다르죠.
에밀리의 이런 배경 덕에 이 작품엔 다른 작품들이 가졌던 장점을 하나 잃고 맙니다. ‘가난하고 불행하지만 총명한’ 여주인공이 특유의 기지로 범죄를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사랑도 얻고 명예도 얻고, 결국은 지금까지의 인생과는 전혀 다른 행복으로의 국면을 맞는다는 ‘동화적 쾌감’을 말이에요. 이런 ‘비현실성’이야말로 ‘비현실적인’ 추리소설을 통해 독자들이 얻어가는 것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추리소설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의외의 결말이 주는 카타르시스도, 사실 알고 보면 이런 ‘비현실성’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니까요.
이 작품에서도 작가는 범인을 통해 흥미로운 인간 심리를 고발합니다. ‘친밀감’의 배후에 도사린 전혀 다른 감정의 존재 말이에요. 친밀한 감정은 분명 긍정적인 것이지만 보이는 것과는 달리 부정적인 감정을 내포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기나 질투 같은 것들 말이에요. ‘애증(愛憎)’이라는 단어만 봐도 그렇죠. 애정과 증오가 동전의 양면 같듯, 선(善)의 감정은 언제든지 악(惡)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기보다 뭐든지 잘하는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토로하는 퍼스하우스 양의 말은 충분히 공감이 가죠. 그러고 보면 ‘친한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도 어른들이 괜히 하는 말이 아니더라고요.
사족.
크리스티의 작품들 중에서 미국 쪽으로 시장을 옮겨가면서 제목이 바뀐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작품이 최초의 것이라고 합니다. 미국판 제목은 <시타포드의 비밀 (the Sittaford Mystery)>이라죠. 황금가지 판은 이 제목을 썼네요.
스키를 이용한 트릭은 그렇게 창의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과거 스포츠 신문의 인기 꼭지였던 ‘추리 퀴즈’에서 한두 번은 본 것 같습니다. 그런 걸 보면 꽤 유명한 트릭인 것 같기도 하고요. 그 트릭이 이 작품이 최초인지, 크리스티도 다른 작품에서 차용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작품 곳곳에 ‘내러콧’ 경감의 잘생긴 외모를 은연중에 강조하는 부분이 더러 있습니다. 그 외모가 스캔들을 일으키지도 않는 것을 보면 작가가 무의식적으로 그런 것 같은데, 얼마나 잘 생겼는지 그 얼굴을 한 번 보고 싶더군요. 사실, 크리스티의 작품들 중엔 (잘생긴 탐정이 아닌) ‘잘생긴 경찰’이나 ‘잘생긴 수사관’들이 등장하는 것들이 꽤 많은 것으로 기억됩니다. 작가에게 잘생긴 경찰에 대한 모종의 환상이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요.
이 책의 정보는 아래로... 해문 판과 황금가지 판으로 연결됩니다.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38202642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DGT00022847515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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