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해로 성인이 되는 ‘아이리스’는 형부인 ‘조지’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녀의 언니인 ‘로즈메리’는 1년 전, 다섯 명의 손님들이 초대된 자신의 생일 파티에서 의문스런 자살을 했으며, 아이리스와 조지는 아직 그녀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에 조지에게 로즈메리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고 주장하는 익명의 편지가 배달되고, 조지는 아내의 죽음에 의심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정확히, 로즈메리의 죽음이 있은 지 1년 후, 그녀의 생일 파티가 열렸던 같은 레스토랑의 같은 테이블에 초대된 동일한 손님들이 보는 앞에서, 조지 또한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됩니다.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의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캐릭터로 ‘에르큘 포와로(Hercule Poirot) ’와 미스 ‘제인 마플(Jane Marple)’을 들 수 있는데, 작가는 왕왕 다른 주인공들을 등장시키거나, 혹은 아예 탐정 역할이 등장하지 않는 소설을 발표하곤 했습니다. 그런 소설들은 그 감상이 추리 소설이라기보다는 일반 소설에 가깝습니다. 추리 소설과 일반 소설의 경계를 어떤 기준으로 구분해야 하는지 모호하긴 하지만요.
이 작품도 그런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다른 소설에서 간간이 조역으로 얼굴을 비쳤던 ‘레이스 대령(Colonel Race)’이 등장하고 있지만 정확히 탐정 역은 아니며, 이야기엔 범죄가 있고, 단서와 풍부한 미스디렉션(misdirection), 그리고 의외의 결말 등, 추리소설의 요소들이 포진되어 있지만 이 작품은 범죄 자체와 그에 얽힌 퍼즐 보다는,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와 심리 등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장(章)에서는 로즈메리의 생일 파티에 있었던 사람들이 1년 후 각자의 입장에서 로즈메리와 그녀의 죽음에 대한 기억을 되짚습니다. 두 번째 장은 익명의 편지를 받고 의문을 가진 조지가 같은 파티 장소에서 죽음을 맞기까지의 내용이고, 세 번째 부분에선 시원스런 결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첫 번째 장입니다. 여섯 사람의 공통된 기억을 각자의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는 첫 장은 인물들의 마음속을 드나들며 그들의 기억과 생각, 그리고 당시의 감정들을 끄집어내어 보여주는데, 이는 이 작품이 작가의 여느 작품들보다 플롯에 많은 공을 들인 결과로 보입니다.
캐릭터들을 다루는 작가의 장기는 이 작품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됩니다. 작가가 작품 생애 전반에 즐겨 등장시켰던 정치인, 부자 사업가, 귀족 등의 유한계급의 인물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작가는 세밀하고 날카로운 묘사로 그 전형성을 극복합니다.
모든 인물들의 감정은 살아 있으며, 한 인물의 죽음으로 인한 손익은 모두에게 얽혀 있습니다. 그들에게 드리워진 탐욕과 두려움, 애정이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성정의 그늘은 독자로 하여금 그들을 동정하게, 혹은 미워하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작가는 그들 모두에게 범죄의 동기를 심어주는 데에 성공합니다.
추리 소설의 묘미는 미스디렉션(misdirection)에 있습니다. 이른바 가짜 단서들로 독자들을 헛다리짚게끔 만드는 기술적인 측면인데, 추리작가로서 크리스티의 가장 뛰어난 능력이 바로 이 ‘함정’을 잘 판다는 사실입니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구사하는 ‘트릭’은 ‘플롯과 구조’라는 틀에 귀속되어 있는 문학의 구성 요소로서 존재합니다. 크리스티 작품 속의 트릭은 단편적이고 독립적이기보다 대개 스토리, 인물, 사건 등과 밀접하게 얽혀 있는데, 이는 40년대 이후로 나타나기 시작한 작가의 새로운 경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데뷔작 이후, 30년 대의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40년대 이후의 작품들의 트릭은 단순히 퍼즐을 좀 더 어렵게 하기 위한 도구이기보다 이야기 안에 녹아들어 다른 요소들과 복잡한 역학관계를 만들어 그 감상을 풍부하게 만드는 문학의 한 장치로서 작용합니다. 이 작품의 엔딩에서 밝혀진 진상에 독자들이 ‘과연 그럴까?’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 하다가도 ‘아하!’하며 무릎을 칠 수 있는 이유도, 그리고 이 작품이 단순한 미스터리 소설이 아닌, 범죄를 소재로 인간의 사랑과 운명, 세속적인 욕망을 말하고 있는 ‘그냥 소설’로 읽히는 이유도 ‘트릭’을 포함한 작품의 모든 요소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그것들이 어느 한 목적에 국한되지 않고 유동적으로 기능하는 때문이기도 합니다. (짧은 글이라도 한 편 완성시켜본 분들이라면, 그렇게 쓰는 일이 어지간한 ‘내공’으로는 턱도 없다는 것을 모두 공감하실 겁니다.)
이 작품은 작가의 대표작은 아니지만, 많은 팬들이 좋아합니다. 사실 크리스티의 ‘대표작’들은 말 그대로 작가의 ‘대표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명하지 않은 작품들이라고 특별히 인기가 없거나 질적인 면에서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크리스티는 평생(심지어 여든이라는 고령에도) 왕성히 글을 쓰며 꾸준히 걸작들을 발표했습니다. 작가의 작품들에 걸작들이 많다는 것은 작가의 전성기가 어느 한 시기에 치우쳐 있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45년에 발표한 이 작품은 작가 인생의 딱 절반을 산 시기에 쓴, 중간자적인 정체성을 지닙니다. 이삼십 년대의 대표작들이 그런 것처럼 적당히 트릭을 구사하면서, 후기작들의 주된 경향인 스토리텔링에도 힘을 쓴 흔적이 역력하기 때문이죠.
이 작품은 ‘다시 쓰기’의 여왕답게, 작가가 이전에 발표한 <노란 붓꽃(Yellow Iris)>이라는 단편을 장편으로 개작한 작품입니다. 추리 단편의 특성 상, ‘사건과 해결’에 치중됐던 단순한 플롯을 작가는 장편으로 개작하며 죽음과 행복, 사랑 등의 삶의 보편적인 모습들을 얽어내며 소수의 사람들이 보이는 악한 행위를 통해 대개의 사람들이 지닌 선한 면을 이야기합니다. 이 작품의 키워드는 바로 ‘사랑’이이며, 인간 본성의 선한 측면은 ‘사랑’을 통해서 드러난다고 작가는 말합니다.
‘아이리스’가 형부의 죽음을 ‘언니가 데려간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아마 크리스티는 ‘죽음’에는 정해진 때가 있다고 믿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 ‘만성절’이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11월 1일, 만성절(萬聖節, Hallowmas)이란 서양의 명절입니다. 기독교에서 죽은 성인들을 기리는, 일종의 제삿날이고 만성절 하루 전인 10월 31일은 우리가 잘 아는 ‘할로윈 데이(Halloween Day)’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엔 <전설의 고향>같은 TV시리즈에서 느껴질 법한 여운이 있습니다. 죽은 로즈메리의 유령 따위가 자주 언급되며 결말 또한 차분한 슬픔이 전해집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라며, 불행한 사람들은 자신의 불행과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성공에 악착같이 매달리고, 평범하거나 오히려 실패한 부류에서 진정한 행복한 삶을 발견하기 쉽다고 부연한 ‘스티븐 패러데이’의 말과 범인의 동기를 엮어 생각해보면 평생 몇 채의 집을 소유하고 인세만 해도 어마어마했던 애거서 크리스티의 삶은 불행했을까 행복했을까 궁금해집니다.
사족.
미스터리 작가에 대한 농담은, 이미 성공한 작가의 여유에서 오는 것이겠죠. 많이 부럽습니다.
또 사족.
작가의 자국인 영국에선 <Sparkling Cyanide(번역하자면, 번쩍거리는 청산가리)>라는 제목으로 출판됐지만, 미국 시장에서는 <Remembered Death>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저는 작가가 원래 붙인 제목을 더 좋아하는 편이지만, 이 작품 만큼은 미국 시장의 제목이 더 마음에 듭니다. 마음을 울리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죠.
죽음을 잊는다는 것은 죽은 자에 대한 예의이고 산 자에게는 또 다른 기회이며 희망이지만, 때때로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죽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노란 리본’에 가슴 아파하는 이유도 바로 그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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