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제인 마플(Miss Jane Marple)은 어느 날, 초면의 변호사들로부터 자신들의 사무실을 방문해달라는 초대를 받습니다. 최근에 세상을 뜬 갑부, 제이슨 래필 씨(Mr. Jason Rafiel)와 관계가 있는 것 같았는데, 래필 씨와는 몇 년 전, 카리브 해의 어떤 휴양지에서 함께 살인사건에 휘말렸던 적이 있었죠. 가타부타 자세한 내막도 없이 오직 호기심만 자극하는 그 초대에 응한 마플 양은, 그곳의 두 변호사들로부터 죽은 래필 씨가 마플 양을 직접 지목하여 남긴 유언을 듣게 됩니다. 그건 죽은 래필 씨가 자신을 위해 어떤 의문을 해결해달라는 부탁이었으며 그 임무를 완수했을 때, 많은 돈이 보상으로 기다리고 있다는 말 외엔 아무것도 아니었죠. 모든 것이 오리무중인 그 제안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건, 아니면 귓등으로도 듣지 않건, 그건 오롯이 마플 양의 선택이었지만, 고인이 된 래필 씨가 허튼 소리나 지껄이는 노인네가 아님을 알고 있는 마플 양은 모험심을 자극받아 그 제안에 응하게 됩니다. 이후에 래필 씨의 다른 지시가 변호사들을 통해 전달되고, 마플 양은 그 지시대로 어떤 버스 투어 행렬에 합류합니다. 그 여행에서 마플 양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평범해 보이지만 의심스러운 여행객들, 의문의 죽음. 그리고 비밀을 품고 있는 듯한 세 자매.
마플 양은 그 어디에도 드러나 있지 않은 범죄를 찾아 안개 속으로 첫발을 내딛습니다.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의 거의 말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도입부가 무척 매력적입니다. 작품 중, 마플 양의 표현대로 ‘무덤으로부터의 메시지’란 설정도 그렇지만 마플 양이 나설 동기가 전혀 없다는 사실도 그렇죠. 일단 구체적인 범죄나 적극적으로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미스터리가 없는 거죠. 마플 양이 아무리 안테나를 잔뜩 세워 주변 사람들을 관찰해도 도무지 갈피가 잡히질 않습니다. 범죄의 흔적조차 없는 상태에서 마플 양은 자신에게 내려진 숙제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어요.
이런 도입부는 미스터리 장르의 규칙을 완전히 뒤엎어버리는 발상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위험한 시도죠. 추리소설의 제1규칙은 요즘의 영화 장르의 것과 비슷해요. ‘초반 10분 안에 도발적인 사건으로 관객들을 사로잡기’. 추리소설의 경우엔 ‘첫 열 장이 넘어가기 전에 범죄가 등장하여 독자들을 사로잡기’이겠죠.
대신 이 작품은 ‘범죄의 흔적’을 찾아나서는 마플 양의 모습으로 도입부를 장식합니다. 그건 여느 범죄의 등장만큼이나 독자들의 흥미를 끌죠. 독자들은 어딘가에 있을 범죄를 찾아 마플 양과 그 동선을 함께 하며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범죄와 그 진상은 마지막 페이지까지 독자들의 호기심을 붙잡아 놓기에 충분하죠.
60년대에 들어서면서 크리스티의 작풍(作風)에도 변화가 왔습니다. 종전의 작품들에서 범죄의 동기가 인간 본성의 사악함의 표면에 머물렀다면, 60년대 이후의 작품들에서는 좀 더 내면적이고 복합적이며 사(私)적인, 다소 정신분석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는 동기를 가진 범죄가 등장합니다. 그 대표적인 작품들이 바로 이 작품과 <엄지손가락의 아픔 (By the Pricking of My Thumb, 68년 作)>, <할로윈 파티(Halloween Party, 69년 作)>, <코끼리는 기억한다 (Elephant Can Remember, 72년 作)>등이죠. 그런 특성이 강한 작가의 후기작들은 그래서 살인의 방법이나 물리적인 트릭을 내세우기보다 ‘범죄의 동기’에 더욱 무게를 두려는 경향이 짙습니다. 그런 흐름은 작가의 작법과 팬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크리스티의 후기작들을 읽다 보면, 범죄 구상이나 트릭 짜기보다 플롯 구성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흔적이 더러 발견되고 독자들은 그런 경향의 부산물인 ‘추리소설답지 않음’에 열광했으리라 짐작합니다. 이런 경향의 변화로 60년대 들어 크리스티에게 새로운 팬들이 많이 생겨났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요.
이 작품의 범죄의 동기는 ‘사랑’이지만 대체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범한 형태의 사랑은 아닙니다. 종교적이고 아가페적인, 세속적이지 않으면서 성(聖)적인 영역의 그것에 가까워요. 그런 사랑을 동기로 저질러진 살인은 평범한 치정 범죄의 영역을 넘어섭니다. 그래서 (아이러닉하게도) 범죄자는 더 무섭게 느껴지죠. 마플 양의 눈을 통해 본 범인의 마음속은 이기적이고 음험하며 어둠 속에서 똬리를 틀고 잔뜩 움츠려있는 뱀처럼 위험하고 사악해 보입니다. 그러면서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슬픔이 저수지 밑에서 빛을 내며 썩어가는 나뭇가지처럼 악마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내죠.
이 작품엔 전반적으로 묘하게 흐르는 시(詩)적인 분위기가 있는데, 그것은 종종 ‘슬픔’이란 정서로 이어집니다. 이 또한 작가의 후기작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생의 말년에 들어선 작가가 (비록 자신의 이야기 안에서이지만) 비로소 범죄자들에게도 동정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 상상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작가의 42년 作인 <서재의 시체 (Body in the Library)>와 많은 공통점을 같습니다. 마플 양의 등장, 오인(誤認)된 신분, 범죄를 숨기기 위한 범인의 속임수 등등. 하지만 두 작품의 느낌은 사뭇 다릅니다. <서재의 시체>가 발랄하고 경쾌한 느낌의 전형적인 ‘추리소설’이었다면, 이 작품은 무거운 느낌에 인간의 내면에 더욱 천착한 ‘일반소설’ 같은 느낌이 강하죠. 어떤 작품의 편에 설지는 독자들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두 작품 모두 개성이 강한 편이라 저울질이 다소 어렵긴 해도, 이 <복수의 여신>을 좀 더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렇다고 <서재의 시체>가 재미없는 소설이라는 말은 절대 아니고요.
이 작품의 평가나 질(質)적인 성과 외적으로 주목할 것은 여든을 넘긴 노(老)작가의 에너지입니다. 크리스티는 이 작품 이후로도 물론 두 작품을 ‘더’ 완성하고 출판할 만큼 노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만들고 글을 쓰는 것에 대한 의욕과 열정이 여전했다는 것은 정말이지 경의를 표할 만합니다. 본인은 위에서 ‘에너지’라는 단어를 썼지만, 사실 그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애정’이 선행되어야 하겠죠. 애거서 크리스티가 그의 팬들로부터 물론 사랑도 받았겠지만 ‘존경’받는다는 말이 더 적당한 이유이기도 하고요. 본인으로서 가장 부러운 것도 그 ‘능력’보다는 크리스티로 하여금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내게 한, 바로 그 ‘애정’입니다.
‘래필 씨’라는 인물이 (죽어서나마) 다시 등장한다는 이유로, 이 작품은 64년의 <카리브 해(海)의 비밀 (the Caribbean Mystery)>의 속편 취급을 당합니다만, 제 생각엔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고 그 작품과 별로 연관성도 없습니다. 하지만 평론가들에 의하면 크리스티는 생전에 이 두 작품들과 더불어 다른 한 작품을 완성시켜 3부작을 완성하려고 했는데, <Woman's Realm>이라는 제목만 지어놓고 타계했다고 합니다. 세 편의 작품이 한데 묶여 3부작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제목뿐인 세 번째 작품을 봐야 알겠지만, 무엇보다 크리스티의 67번째 장편이 되었을 그 작품이 어떤 이야기였을지 몹시도 궁금합니다. 마플 양이 나오리란 예상은 하고 있지만요.
사족.
이 작품에서 동성애 텍스트를 읽어내는 독자들이 별로 없다는 것에 약간 놀랐습니다. 범죄자와 피해자의 관계, 살인의 동기 등에서 그런 면면들이 은근히, 하지만 꽤 꾸준히 암시되거든요.
이 작품이 출간되기 2년 전(69년), 미국에서 ‘스톤월 항쟁’이 있었다는 사실에 그런 감상이 우연처럼 보이질 않습니다. 스톤월 항쟁은 그 역사 상, 동성애자 인권 운동의 신호탄이었으니까요. 그 사건이 대서양 건너 영국의 노작가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으리라 상상을 해봅니다만, 그건 그냥 짐작일 뿐이죠.
이 작품 이후로 작가가 완성하고 출판한 두 소설은 <코끼리는 기억한다 (Elephant Can Remember, 72년 作)>와 <운명의 문 (Postern of Fate, 73년 作)>입니다. 각각 에르큘 포와로(Hercules Poirot)와 부부 탐정인 타미와 터펜스(Tommy & Tuppence)가 등장하죠.
작가의 타계 직전에 출간된 <커튼 (Curtain, 75년 刊)>과 사망 후에 출간된 <잠자는 살인 (Sleeping Murders, 76년 刊)>은 두 작품 모두 사후에 발표하기로 하고 40년대에 미리 써놓은 거라, 집필 순서로만 본다면 <운명의 문>이 크리스티의 유작이 되는 거죠.
<잠자는 살인>에도 마플 양이 등장하지만, 이 <복수의 여신>이 미스 마플의 마지막 사건인 셈이에요. 그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 작품을 읽으면 우리가 사랑하는 할머니 탐정에게 ‘그럼 이젠 안녕’ 하며 작별 인사를 하고 싶어지죠. 이 소설의 여운이 길고 특별한 데에는 그런 점도 한 몫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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