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A.의 요원인 수잔 쿠퍼와 브래들리 파인은 콤비입니다. 하지만 브래들리가 일선에 몸소 나서서 직접 부딪치는 행동 요원인 반면, 수잔은 내근 요원이죠. 브래들리가 현장의 위험과 모험을 겪는 동안, 수잔은 그와 교신을 할 수 있도록 여러 장치들이 갖춰진 사무실을 지켜야 해요. 불공평하죠. 수잔에게 브래들리와 동등한 기회가 없는 건 둘째 치더라도 작전을 아무리 성공리에 수행해도 그 공은 브래들리에게 향하기 쉬우니까요. 더군다나 수잔은 비밀요원으로서 어울리지 않는 외모를 하고 있어 여러모로 무시당하고 소외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불공평한 건 수잔이 브래들리를 오랫동안 짝사랑해왔다는 사실입니다. 브래들리는 그런 수잔의 감정을 당연히 모르고요.
그러다가 핵무기 밀거래 현장을 뒤쫓던 브래들리가 죽임을 당하자 후임이 필요하게 됩니다. 하지만 C.I.A.의 중요 요원들에 대한 정보가 악당에게 노출됐다는 소식이 들리자 수잔이 그 일에 자진합니다. 요원이 된 이후로 내내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었으니 얼굴도 알려져 있지 않은데다 브래들리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도 필요했으니까요. 이제야 겨우 스파이다운 스파이가 된 수잔은 임무도 멋지게 완수하고 브래들리에 대한 복수도 하리라 각오를 다지지만, 시작부터 삐거덕거리기 시작합니다.
이야기만 본다면 무척 흔한 이야기입니다. 왕따에 루저인 주인공이 온갖 편견과 시련을 겪다가 마침내는 그것들을 극복하고 뛰어 넘는 이야기죠. <미운 오리 새끼>의 헐리웃 오락 영화 버전인 셈인데, 그런대로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에 익숙한 주제, 문화와 정서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그런대로 공감 가는 유머와 변장술의 달인이라는 설정에 맞게 시퀀스마다 차림을 달리 하는 수잔의 코스플레를 보는 재미가 쏠쏠해요. 흔히 하는 말로 ‘고민이나 걱정은 뒤로 하고’ 극장 안에서의 그 순간만큼은 즐거울 수 있는 영화입니다. 특별히 칭찬할 것도 트집 잡을 것도 없죠.
수잔이라는 캐릭터는 영화에 써먹기 참 쉽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숨은 재주꾼이지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다가, 일촉즉발의 순간에 제실력을 발휘하는데, 알고 보니 능력자에 만능이더라, 이런 식이죠. 이런 점이 약간 거슬리긴 하는데, 이런 장르의 이런 목적을 가지고 이런 캐릭터로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이 또한 영화적인 관습인데 그런대로 봐줄 만한 것은 수잔을 연기한 ‘멜리사 맥카시’의 덕이라고 할 수 있지요.
영화의 목적은 가시적입니다. (후덜덜이 아닌) 후덕한 몸매를 지녀 스파이로서의 면모와는 거리가 한참 먼데다가 현장 경험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초짜 아닌 초짜 스파이를 폭력의 현장에 밀어 넣고 그 위험하고 어려운 임무를 완수하는 과정에서 어떤 장기가 발휘되는지를 통해 웃음과 재미를 주는 거죠.
영화의 노림수도 뻔합니다. 주인공의 외모와 날렵한 액션의 상관관계에 대한 관객들의 편견을 뒤엎어 버리며 그 간극을 활용해 극적 쾌감을 주는 거예요.
애초에 수잔은 C.I.A.의 훈련생 시절에 이미 그 실력을 인정받은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무실을 지키도록 한 것은 외모로 인한 차별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는데, 영화는 이런 식으로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비판과 여성의 외모에 대한 폭력에 가까운 편견을 에둘러 공격합니다. 영리한 건지 비겁한 건지는 관객들의 판단에 따라 다르겠죠. 어쨌거나 뚱뚱한 여자 캐릭터를 웃음의 도구로 만든 것에 대해 괘씸하거나 불편한 기분이 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이슈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어서 그 주제에 대해 진지한 접근이 가능할 수 있었어요.
수잔은 영화 속에서 영웅입니다. 수잔은 영리하고 섬세하며 용감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남자 못지않은 의리도 있는데다 위험한 순간에도 여유가 있고 무엇보다 제 할 일을 다 하고 있죠. 뚱뚱하다는 이유로 자신을 차별한 사람들에게 진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그들의 잘못을 뉘우치게 합니다. 상황이 역전되는 거죠. 이 영화의 진정한 카타르시스는 액션 장면보다 수잔이라는 캐릭터가 주위에 받아들여지는 방식이 역전되는 클라이맥스에서 우러나옵니다. 약간 과장해서 ‘인간 승리’인 거죠.
코메디 영화이기 이전에 액션 영화지만, 남성 관객들보다 여성 관객들에게 어필할 가능성이 큽니다. 주인공도 그렇고 악당도 그렇고 모두 여자거든요. 물론 남자 캐릭터들도 중요한 배우들이 연기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들러리 수준입니다. 특히 제이슨 스테이덤의 캐릭터는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인물이죠. 영화를 본 직후엔 배우가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제이슨 스테이덤의 재발견’이란 말이 전혀 거짓말이 아니게 들려요. 진정한 배우란 이런 역할도 하고 저런 역할도 하기 마련인 거죠.
사족.
어쩌면 이 영화를 ‘뚱뚱한 여자들의 판타지’로 보는 관객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외모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날렵한 액션에 매력적인 성격으로 나중엔 뭇 남성들의 러브콜까지 받으니까요. 비뚤어진 관점이건 부정적인 관점이건 그런 감상도 있을 수 있죠.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웃고 즐기자는 코미디 영화인 것은 분명한데, 주인공 캐릭터 자체에도 그렇지만 이야기 안에서 기능하는 방식에 무척 예민한 요소들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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