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에스토니아. 외딴 집에서 가족도 이웃도 친구도 없이 홀로 살고 있는 노년의 ‘알리데’는 어느 밤, 자신의 마당에 숨어들어온 십대 소녀를 발견합니다. 초라하고 천박한 몰골에 거의 초죽음 상태인 ‘자라’라는 이름의 그 소녀를 알리데는 의심하고 경계하지만 차츰 그 아이의 딱한 사정을 믿고 동정하며 돕게 됩니다. 그러던 알리데는 자라가 갖고 있던 사진 한 장으로 그 소녀가 자신의 조카 손녀(언니의 딸의 딸)임을 알게 되고 과거의 일을 회상하기 시작합니다. 과거에 그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노년의 알리데와 그녀의 조카 손녀인 자라가 등장하는 현재의 이야기와 알리데의 회상 장면이 병치되어 진행되죠. 물론 보다 중요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는 알리데가 회상으로 들려주는 과거의 이야기에요.
젊은 알리데는 ‘한스’를 사랑하지만, 한스는 알리데의 언니인 ‘잉겔’과 사랑에 빠져 있습니다. 알리데는 곧 형부가 될 사람을 짝사랑하게 된 자신의 고약한 처지를 한탄하지만 언니를 연적으로 삼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 사랑 앞에선 알리데는 속수무책이죠. 한스를 향한 알리데의 짝사랑은 한스를 형부로 맞이함으로 그 사랑이 수그러들기는커녕 점점 더 성난 불처럼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타오르게 됩니다.
당시에 에스토니아는 소비에트 체제 하에 있었고, 한스는 조국의 독립을 원하는 의용군에 입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무모한 싸움에 무참히 패배하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한스는 부인과 처제가 사는 시골집으로 숨어들게 되는데 공산당 정부의 추적은 여전하고 심지어 그 가족들조차 위협을 받게 됩니다.
영화의 배경을 잠깐 적자면, 10월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붕괴되고 잠깐 독립되지만, 39년, 소련과 나치 치하의 독일 간의 밀약을 통해 다시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된 에스토니아를 배경으로 합니다.
영화는 당시(아마도 40년대 초)의 에스토니아의 정치적 상황을 꽤 비중 있는 소재로 다루면서도 그것을 전면에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대신 이야기는 두 자매와 한 남자의 삼각관계 로맨스에 집중하죠. 역사를 배경으로 한 녹진한 멜로드라마라고 할 수 있어요.
영리하고 적극적이면서도 처신하는 법을 잘 알고 있는 알리데는 지극히 인간적인(영화적으로는 상당히 입체적인) 인물입니다. 이타적이면서도 적당히 이기적이며 애국자이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이용하기도 하죠. 알리데의 선의(善意)는 맹목적인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이야기 안에서 보이는 알리데의 모든 판단과 행동은 관객에 따라 다른 의도로 읽힐 수가 있어요.
예를 들어 공산당의 간부인 ‘마틴’과의 결혼은 자신을 위한 안전한 선택일 수도 있고 가족들을 위한 희생일 수도 있습니다. 언니 모녀에게 누명을 씌우는 것은 보다 안전해 보이는(실은 그렇지 않지만) 시베리아로 그들을 보내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자신의 사랑에 기회를 주고 핑계를 만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영화의 긴장감은 영화의 배경인 정치적인 상황이 아닌, 그 속을 알 것 같으면서도 명확하지 않은, 알리데의 그런 심리에서 우러나옵니다.
공산치하의 조국과 민중의 반란, 그 사이에 놓인 사람들의 아슬아슬한 분위기 속에서 사랑하는 형부와 함께 자신을 스스로 기꺼이 가둔 여자의 녹진한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가다가 관객들의 감정을 휘몰아치는 클라이맥스는 가히 압권입니다. 알리데가 흘리는 눈물, 자신을 속이고 자신의 계획을 방해한 한스를 향해 터뜨리는 분노에 아마도 거의 모든 관객이 공감하리라 생각됩니다.
노년의 알리데와 조카 손녀 자라가 만들어내는 현재의 드라마는, 어떻게 보면 과거 이야기를 이끌어내기 위한 작위적인 장치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오해를 풀지 못하고 헤어진 채 반 세기 넘는 세월 동안 헤어져 서로의 생사조차 모르는 두 자매의 화해가 세대를 뛰어넘는 두 여자, 알리데와 자라 사이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리고 자라가 처한 위급한 상황에 대한 이해에서 관객들은 시간을 넘어선 사랑과 우애, 가족애의 보편적인 가치, 형태를 바꾸며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타인에 대한 육체적, 정신적 폭력에 대한 혐오, 진정한 희생의 의미 등에 대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충격적이면서도 긴 여운을 남기는 엔딩은 무척 인상적입니다. 70년 세월을 지켜온, 곳곳에 가족들은 물론이고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 없었던 남자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그 집에 불을 지를 때 알리데는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그 후로 알리데는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됐을까요. 그 이전에, 알리데는 왜 그 집을 떠나지 못했던 걸까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요. 과연 무엇을.
에스토니아라는 나라에 대한 세계사적인 지식이 없어도 이 영화를 감상하는 데에 큰 지장은 없겠지만,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링크로 들어가 에스토니아의 역사에 관한 부분을 읽어보세요. ‘위키 백과’의 에스토니아 항목으로 연결됩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7%90%EC%8A%A4%ED%86%A0%EB%8B%88%EC%95%84
그리고 이 영화의 정보는 아래로...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Main.do?movieId=74413
'꽃을 보기_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 기프트_the Gift_2015-리뷰 (0) | 2016.01.23 |
---|---|
선글라스와 총을 가진 차 안의 여자_the lady in the Car with Glasses and a Gun_2015-리뷰 (0) | 2016.01.23 |
트루스 어바웃 엠마뉴엘_the Truth About Emmanuel_2013-리뷰 (0) | 2016.01.09 |
오디션_Starry Eyes_2014-리뷰 (0) | 2016.01.09 |
로절린드 리의 마지막 유언_the Last Will and Testament of Rosalind Leigh_2012-리뷰 (0) | 2016.0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