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읽기_책

침이 고인다_김애란-리뷰

달콤한 쿠키 2016. 5. 3. 03:56



솔직히 말해 사는 일은 고단합니다. ‘삶을 즐기고 있다’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은 걸 보면, 그 생각이 맞는 것 같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들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으앙, 하고 우는 것을 봐도 그 생각엔 틀림이 없는 것 같아요. 그 울음은 이제 고생 시작이군, 하는 푸념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삶의 만족도를 높이는 조건에 여러 가지가 있고 그것들은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그 중 몇 가지는 아주 분명한 것처럼 보입니다.

우선 경제력과 일은 그게 그것처럼 보이지만 명확하게 구분됩니다. 좋아하는 일이지만 돈벌이가 별로 안 될 수도 있고, 돈은 잘 벌지만 그 일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좋아하는 분야를 업(業)으로 삼을 수 있게 되어 두 가지 조건이 착착 맞아 떨어지는 게 행복한 인생의 청사진이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그래도 둘 중의 한 개의 조건만 충족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세상에 돈이면 안 되는 것들은 별로 없고, 돈벌이가 별로여도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한다는 것 자체가 행복과 만족으로 연결되는 경우를 우리는 더러 보니까요.


‘직업과 돈’이 행복과 만족의 물리적인 면에 맞닿아 있다면, 사는 동안 우리가 타인과 맺는 그 많은 ‘관계’들은 정서적인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뒤처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만큼 혼자 남지 않기 위해서도 갖은 애를 씁니다. 하지만 역시나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스트레스는 타인으로 인해 비롯됩니다. 그것들을 피하기 위해 차라리 무인도에 있기를 바라보지만 그럴 때조차 우리는 위로를 위해 또 다시 타인을 찾게 됩니다.


작가 김애란의 이 소설집에 나오는 인물들도 그런 사람들입니다.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공부했지만 현실은 그저 그런 사람들, 그럼에도 행복해지기 위해 치열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 삶의 만족을 찾기 위해 일반적인 삶의 궤도를 성실하게 쫓고 있지만 그것이 올바른 길인지 의심에 시달리는 사람들, 그 과정 위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행복해 하거나 시달리는 사람들. 작가는 그 인물들의 삶을 보여주며 독자들에게 묻습니다. ‘님들은 잘 살고 계시냐’고요.



<도도한 생활>의 ‘나’는 만두가게 딸이면서 어렸을 때 ‘피아노’라는 소소한 사치도 누린 인물입니다. ‘나’는 언니의 지하 자취방에 얹혀살게 되면서 피아노까지 달고 이사를 오는데, 아버지가 선 빚보증이 잘못 되어 집안의 값나가는 가재도구들을 모두 팔면서도 피아노를 팔지 않은 엄마를 이상해하면서 피아노에 대한 애착을 숨기지 않습니다.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편입을 준비하고 있는 언니의 지하 단칸방에 빌붙어 살면서 문서 작성 아르바이트를 하는 ‘나’에게 피아노는 과거의 영광, 잠시나마 누렸던 허영을 증명해주는 유물인 동시에, 불확실한 미래와 속수무책인 현실로부터의 도피처로도 보입니다.

비가 새는 지하방에서 허둥지둥 물을 퍼내다가 피아노를 두드리고 우연히 마주친 언니의 술 취한 옛 애인의 치아를 들여다보는 엔딩의 난장판은 마치 앞뒤가 없는 우리의 인생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그 뒤로 가을과 겨울이 오는 것처럼, 우리가 사는 모습은 그런 수순이 딱히 없으니까요. 수학 공식처럼 아귀가 딱 들어맞는 인생이라면 재미도 없겠지만요.



이런 현실에 대한 고민이 ‘방(房)’이라는 소재로 상징화된 <성탄 특선>에서는 단칸방에서 함께 자취하고 있는 오누이가 등장합니다. 평소 ‘야동’을 보려고 해도 여동생의 눈치가 보이는 오빠와 남자친구와 ‘기억에 남을 만한’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을 보내기 위해 서울 곳곳을 누비며 모텔 방을 찾아 헤매는 여동생 커플의 성적 욕망은 <도도한 생활>에서 보였던 궁핍 속의 작은 허영이 변태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작품에서 이런 욕망들은 무척 순수해 보입니다. 마치 가난한 일상 속에서도 최소한의 존재감과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이는데, 연말 분위기에 어울리는 그럴듯한 옷이 없어 남자친구에게 거짓말을 해야 했던 여동생의 과거 사연은 유머가 넘치는 작품에 의미심장한 페이소스를 부여합니다.



<자오선을 지나갈 때>의 ‘아영’은 학원 강사 경력 삼 년차로, 면접을 위해 전철로 한강을 건너면서, 노량진에서 재수생으로 살았던 과거를 회상합니다.

당시 열아홉의 어정쩡한 나이에도 아영은 그때 이미, 세상사 수요와 공급의 문제 아래, 자신들을 필요로 하는 곳은 정해져 있고 너나할 것 없이 서로 비슷비슷하며, 무척 자연스러운 그 치열한 경쟁의 구도 안에서 인생을 제대로 살기도 전에 경쟁과 패배감에 머지않아 익숙해지리라는 것을 예상했을지도 모릅니다. 과거를 회상하며 아영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아영은 자신을 지나간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지,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지, 꿈을 이뤘는지, 아니면 그 꿈이 조금이라도 가까워졌는지 궁금해 하지요. 아영의 의문대로, ‘정말로 나아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현실에서 ‘길을 잃은’ 젊은이들을 주인공으로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깊은 통찰을 시도하려는 노력은 <침이 고인다>와 <기도>, <네모난 자리들>에서 더욱 구체화됩니다.



<침이 고인다>는 거의 우발적으로 후배를 집에 들이며 같이 살게 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학원 강사로 그럭저럭 살면서, 어느 날 거의 기억도 없는, 단서라고는 그저 ‘같은 학교 후배’라는 사실뿐인 다른 여자를 집안에 들이면서 여자의 노곤한 일상은 서서히 깨지기 시작합니다. 직장에 대한 회의감에 겹친 그 긴장과 갈등의 심리를 그린 이 작품은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이기심인지, 혹은 독립심인지 묻고 있습니다. 아니면 그저 방해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지나지 않는 걸까요.

‘관계 맺음’을 통해 익숙한 일상을 비집고 들어온 이방인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어쩌면 피곤하고 위험한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에 ‘제대로’ 섞이기 위해서 이런 피곤함과 위험은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일 수도 있겠죠. 우리는 우리의 곁을 파고든 이방인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을까요. 우린 서로에게 완전히 동화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되면 그들은 우리의 일상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단순히 그런 척만 하고 있을 뿐, 알고 보면 끝까지 타인으로 남는 건 아닐까요.

그런 질문들 속에서 작가는 그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했던 우리 곁의 이방인들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집니다. 그들은 우리와 정말 ‘친밀’한 걸까요.

이런 의문과 두려움은 여전하지만 우린 거의 본능적으로 여전히 곁에 누군가를 원합니다. 후배의 아픈 기억이 서린 인삼껌을 씹으며 입안에 고이는 침을 의식하는 주인공처럼 말이죠.



‘관계 맺음’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심이란 주제로 읽히는 <네모난 자리들>은 아이러닉한 작품입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없는 자신이 태어난 방을 방문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처럼, 어른이 되어 대학생이 된 후에 짝사랑하는 선배가 없는 그 선배의 방을 마주하게 됩니다. 주인공은 그곳에 응당 있어야 할 무엇이 없다는 사실과 그 부재를 견디는 방법을 몰라 당황합니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일은 서로를 조금씩 견디는 일’이라던 주인공은 스스로가 다른 사람의 삶에 스며들기를 바라면서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 방어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이 작품을 읽으면 곁의 타인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타인과의 관계는 자신을 그 안에 가두는 것일 수도 있고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일 수도 있어요. 물론 있는 게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그러므로 특히, 누군가를 자신의 인생에 들인다는 것은 어렵고 신중해야 할 일이며, 그럼에도 그 일을 요즘 사람들은 너무 쉽고 성급하게, 그리고 섣부르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집니다.



세상 속의 나, 사회 속의 나, 관계 속의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하는 질문을 하고 있는 작품, <기도>의 여주인공은 고시 재수생(혹은 삼수나 그 이상)인 언니에 비해 그나마 돈벌이를 하고 있다는 것으로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사람입니다.

신림동 고시원의 언니를 방문한 여자는 생면부지의 설문조사원을 마주하고 리서치 문항에 일일이 응답하면서, 매우 사적인 정보를 설문이라는 핑계로 타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는 자신이 믿기지가 않습니다. 그러는 한편, 여자는 자신의 영역을 누군가에 의해 침범당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역 안으로 타인을 초대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위의 세 작품에서 타인과의 관계가 알쏭달쏭한 문제였다면, <칼자국>과 <플라이데이터리코도>에서는 보다 확실한,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는 관계에 대한 작품입니다.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두 작품 속의 ‘어머니’가 ‘어버이’를 의미할 거란 생각엔 의문이 듭니다. 다른 작품들에 등장한 아버지의 모습은 사람 좋은 한량이거나 무능력하거나 귀가 얇은, 그다지 믿음직한 모습이 아니니까요.



<칼자국>의 모녀는 식욕으로 대표되는 가장 원초적인 ‘본능’에 충실한 관계입니다. 두 여자는 엄마와 자식이 아니라 ‘어미와 새끼’로 묘사되며 딸은 어머니를 어머니가 아닌, 완전한 객체로서의 한 인간으로 그 대상을 회상하고 그 죽음을 기립니다.

시집간 딸이 죽은 엄마를 음식을 통해 회상하는 방식은 익숙하지만 작품의 분위기는 매우 신선합니다. 딸에게 있어 ‘죽은 어미’는 그 허기를 해소시켜주는 행위자로 기억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독자들은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작가에게는 엄마라는 존재들이 자식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솔직한 사랑은 동물적인 허기를 해소할 먹을거리를 주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에 엄마는 ‘어미’가 되고 자식들은 ‘새끼’가 됩니다. 모든 가식과 허울을 벗어버린 순수한 사랑, 가장 진솔하고 무조건적인 주고받음의 의미를 작가는 보여주고 싶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사랑을 엄마로부터 그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아이가 주인공인 <플라이데이터리코더>의 배경은 ‘한반도에 이어진 땅이었다가, 후빙기에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만들어진’ 가상의 섬, ‘플라이데이터리코더’입니다. 작명 센스 두드러지는 ‘플라이 데이터 리코더(Fly Data Recorder)’라는 그곳의 이름답게 이 작품의 중요한 소재는 비행기의 블랙박스입니다. 사고로 섬에 추락한 비행기의 블랙박스를 우연히 발견한 아이는, 순진한 마음에 삼촌의 말을 그대로 믿어 그것이 자신의 엄마라고 믿게 됩니다.

비행기의 추락 원인을 밝히려는 정보원의 추적에 ‘블랙박스’와 이별하는 순간에도 그 믿음을 놓지 않는 아이의 모습은 어머니들의 내리사랑만큼이나 그 역으로 향하는 사랑 역시 ‘조건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김애란의 소설은 매력적입니다. 일단 읽기가 쉬워요. 여기가 저기 같고 저기가 여기 같은 이야기는 유려하게 흐르고, 시작도 끝도 없어 앞뒤로 열린 문은 들어갔다가 나오기가 쉽습니다. 익숙한 어휘와 평이한 문장들은 독자들의 눈에 잘 붙는 편이고요.

아이러닉하게도 김애란의 소설은 어렵기도 합니다. 그 구조들을 살피자 하는 이들은, 소위 말하는 ‘기-승-전-결’의 구도가 보이지 않음에 당황하게 됩니다. 도무지 뚜렷한 서사가 보이질 않아 이런 짧은 감상문을 쓰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이 소설집을 세 번이나 읽은 이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극적인 소재 하나 없이 큰 소리도 지르지 않고, 익숙한 인물들과 현실에 천착한 이슈들로 조곤조곤 이야기를 엮어 내는 김애란의 작품들은 독자들에게 분명 매혹적입니다. 작가의 장기는 이 소설집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됩니다. 어마어마한 센세이션을 기대하긴 어렵겠지만 김애란의 글들을 찾아 읽는 독자들에겐 분명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친근한 일상의 빈틈’을 읽어내는 작가의 필력은 잔잔한 수면에 파장을 부르는 ‘물수제비’를 닮았습니다. 큰 물결은 아니지만 마음에 드리워진 평범한 잔영을 만들고 '멈춤'을 뒤흔들어 우리의 이웃들과 친구들, 그리고 우리가 속한 세계를 다른 시각으로 보게 만들어주죠. 그건 분명 큰 변화는 아니어도 의미심장한 ‘무엇’임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게 김애란 소설의 미덕이고 그것들을 읽는 즐거움이기도 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