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원래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 하는 고민과 질문은 아마도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 같습니다. (어쩔 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악을 설명하기 위한 다방면의 연구와 실험만큼이나 결론, 혹은 추론, 혹은 주장(무엇이든)도 다양하고요. 그 고민을 해결하고 질문에 답하기 위해 철학, 종교학, 범죄학, 심리학 등의 여러 분야에서 노력하고 있다는 것도 여전하죠.
다양한 분석과 콘텍스트가 존재하긴 하지만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고전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주제 역시 그 고민과 질문에 천착하는 것 같습니다. 우울하고 음험하고 기형적이며 건조하고 유머가 배제되어 냉소적인 이 작품은 문학적으로 호러 소설의 고전인 동시에 다양한 분야의 학문에 연구 거리를 제공하는 유용한 텍스트이기도 하죠. 그리 길지 않은, 중편 길이 정도의 이 소설이 백 년이 넘도록 연극, 영화, TV드라마, 뮤지컬, 심지어 컴퓨터 게임 등 다양한 변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그런, 선과 악이라는 태곳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작품의 주제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본인 스스로에게 ‘인간은 원래 악한 존재’라는 믿음이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품은 인간의 성악설에 비중이 좀 더 실려 있는 것처럼 읽힙니다. 즉 인간의 본성은 선보다 악에 더 가까우며, 선한 행위보다 악한 행위가 더 쉽고, 생명의 에너지란 곧 인간의 타고난 파괴 본능에 의한다는 식이죠.
약간 비뚤어진 의견이지만 인간의 선한 행동은 보다 강한, 악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이 자극한 부산물, 즉 악에 대한 욕구를 저지하려는 노력에 의한 결과로서의 행동이 아닐까, 하는 감상이 남습니다. 하이드 씨가 완전하고 순수한 악으로서 존재했던 반면, 지킬 박사는 완전한 선은 아니었으니까요. 지킬 박사는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살인을 저지를 수 있었던, 오히려 그 살육 행위에 동물적인 흥분과 쾌감까지 느꼈던 하이드 씨와는 달리 선과 악의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아슬아슬한 모순에 가득한 존재입니다.
이런 암시는 ‘인간의 선한 면과 악한 면은 상황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는 오늘날의 많은 범죄심리학자들의 주장과 사뭇 충돌하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저돌적이고 단선적인 결론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뉴스와 신문 지면을 장식하는 많은 비리와 범죄들을 상기한다면, ‘가장 단순한 것이 정답’이라고 믿는 것이 그리 큰 오류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펭귄 클래식 코리아’ 판의 이 책엔 스티븐슨의 다른 단편 작품이 더 실려 있습니다. 의대 학생들의 해부 수업을 위해 뒷돈을 받고 시체를 거래하는 무덤 도굴꾼의 얘기인 <시체도둑>은 헐리웃에서 오늘날까지 꾸준히 영화화하고 있을 정도로 사랑받는 소재이며, 흡혈귀 이야기인 <오랄라>는 기묘한 엔딩이 인상적인 고딕 로맨스입니다.
<시체 도둑>은 표제작인 <지킬 박사와 하이드>보다 인간의 악을 전면적으로, 그리고 노골적으로 다룹니다. 작가 스티븐슨은 ‘악’의 속성을 극중 인물 울프의 입을 통해 이렇게 전달합니다.
「일단 시작했으면 멈출 수 없어. 시작을 했으면 계속 다시 시작하는 일뿐이야. 그게 진실이야. 악마에게 휴식은 없어. (본문, 153쪽)」
그 반면, <오랄라>는 ‘흡혈’이라는 행위로 대변되는 ‘악’에 대해 핑계를 마련해 주고 있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발적인 선택의 문제를 초월한, 환경적이며 유전적인 원인을 전제로 한다는 작가의 암시를 받아들인다면, 어쩌면 악은 어쩔 수 없는, 태생적인 우리의 본성이라는, 이 선집을 관통하는 테마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흡혈귀 집안의 딸이 십자가에 스스럼없이 손을 얹는 <오랄라>의 엔딩은 ‘악의 존재’가 신(神)의 영역을 초월함을 증명하는 장면이었을까요. 아니면 흡혈귀의 딸이면서 아직 흡혈 행위를 하지 않은 오랄라가 숨어들 곳은 바로 ‘신의 가호’ 아래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혹은 그것도 아니라면 개그의 한 장면처럼 패러디에 불과한 것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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