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영국. 폭격과 공습이 한창인 야전병원이 무대입니다. 독일군의 공습으로 실려 온 구급봉사대원이 수술을 받기 위해 마취를 하는 동안 죽어버리는데, 이런 저런 정황으로 단순한 의료 사고 정도로 처리되죠. 하지만 그 죽음이 살인이며 명확한 증거를 갖고 있다고 공공연하게 떠들던 간호사가 메스에 찔린 시체로 발견되면서 두 사람의 죽음은 연쇄 살인의 양상을 띠기 시작합니다. 병원 측은 스코틀랜드 경시청의 유능한 ‘코크릴’ 경감(Inspector Cockrill)에게 사건을 의뢰하지만 죽음의 마수는 다른 희생자들을 찾아 나섭니다.
‘크리스티애너 브랜드(Christiana Brand)’가 1944년에 발표한 이 소설은 ‘추리소설 황금기의 마지막 걸작’으로 평가받는 전형적인 ‘후던잇(Whodunit)’입니다. 용의자들을 포함한 주요 인물들이 나열되고 살인이 일어나면 탐정이 등장하고 수사를 시작하죠. 군데군데 결정적인 단서들이 숨겨져 있고 의미심장한 복선들과 ‘미스 디렉션(mis-direction)’들이 마구 뒤섞인 이야기를 따라가다 엔딩에 이르면 모든 사건의 전말이 마술처럼 ‘짠!’하고 드러납니다. 이런 구성은 추리소설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혹은 기대하는) 가장 전형적인 플롯이죠.
구성 면에서 다소 전형성을 갖고 있다고는 해도, 이 작품은 그만의 개성이 있습니다. 작품의 배경이 특히 그런데, 한창 전쟁 중인 시대적 배경과 살인사건이 일어난 야전병원이라는 공간적 배경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묘하게 어울립니다. 거기에 삶과 죽음, 삼각관계 로맨스, 그리고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긴장감과 죽음에 대한 공포 등의 심리적인 요소들이 병치되어 작품에 특이한 질감을 부여하죠. 전시 중의 야전 병원이라는 공간은 마치 앨리스가 빠진 토끼굴처럼 보입니다.
이 작품의 장점을 또 하나 들자면, 굉장히 친절하다는 겁니다. 병원이 배경이고 수술실 장면이 적어도 두 장면 나오는데, 작가는 이 생소한 세계를 문외한인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무척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40년대의 의료업계 형편과 지금은 많이 다르고 현대 메디컬 스릴러의 원조격인 ‘로빈 쿡 (Robin Cook)’의 소설까지는 아니겠지만, 작가는 자신의 소재를 정말 잘 다루고 있습니다. 수술실의 차가운 느낌과 긴장된 공기, 스테인리스로 만든 수술 도구들이 내뿜는 날카로운 빛 등이 생생하게 전달되죠.
사실, 추리소설로서 이 작품은 대단한 트릭을 구사하거나 독자들을 엄청난 혼란에 빠뜨렸다가 기막힌 반전을 선사한다거나, 하는 장르적인 쾌감은 덜한 편입니다. 코크릴 경감이 결론에 다다르는 과정엔 비약이 심하고 독자들에게 유용한 단서를 알게 모르게 흘리는 솜씨도 부족하며 살인 방법 또한 단순한데다가 용의자들 모두를 의심의 대상으로 만드는 플롯의 힘도 약한 편입니다. 이런 면에선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가 한 수 위죠.
하지만 작가가 이 작품에서 무척 잘 했고, 그래서 이 작품이 ‘명작’, 혹은 ‘추리소설의 고전’의 반열에 이르도록 한 요인은 작품 전반에 흐르는 작가 특유의 유머 감각과 멜로드라마적 요소입니다. 그런 부분에 집중한다면 이 작품은 추리소설로서 뿐만 아닌 그냥 소설로서도 무척 재미있습니다. 보통 미궁에 빠진 살인을 해결하는 과정과 탐정의 활동에만 집착하던 황금기의 추리소설이 ‘이야기’의 요소들을 강화한 ‘문학’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40년대 추리소설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지요.
여섯 명의 용의자들은 단순히 탐정과 독자들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극적 도구가 아닌, 작가가 촘촘하게 엮어낸 300쪽 분량의 세계 안에서 당당한 ‘주인공들’로 자리매김합니다. 그들 모두에겐 사랑이 있고 치부가 있으며 개인적인 증오, 질투, 두려움, 경솔함과 이기심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진짜 사람들입니다. 각각의 인물들에게 삶의 역사와 개성을 주고 소설 속 세계를 살아가게 하는 작가의 필력은 마지막 책장을 덮고도 그 여운을 오래 남도록 만들어 줍니다.
코크릴 경감은 두 번째 살인이 일어난 후에 사건의 진상을 꿰뚫어봅니다. 하지만 그는 여느 탐정들이 그렇듯 범인을 궁지에 몰아세워 범죄를 폭로하기 보다는, 심리적으로 범인을 압박해가며 스스로 자수할 수 있는 빌미를 주려고 노력합니다. 본인 말로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이는 분명 비록 범죄자라 할지라도 일말의 연민과 동정을 느끼는 코크릴 경감의 인간적인 면모 때문이겠지요. 이런 면이 코크릴이라는 캐릭터를 (그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들이 여덟 개 뿐임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탐정들 사이에서 독자들에게 생명력 있는 인물로 살아남게 했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겠죠.
의외의 범인이 밝혀지고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엔딩에서 코크릴 경감의 인간적인 면모는 한층 더 두드러집니다. 자신과의 의도와는 달리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또 다른 비극이 일어나니까요. 코크릴 경감은 명탐정이긴 해도 수퍼맨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지나치게 믿은 나머지 실수도 할 수 있는 인간이었던 거죠.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코크릴 경감의 시리즈 데뷔작은 아니지만, 그 인물을 정식으로 소개하는 작품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크리스티애너 브랜드는 이 캐릭터로 여덟 권의 장편을 발표했으며, 이 작품은 코크릴 경감이 나오는 두 번째 작품이죠.
범인의 동기에 대해서, ‘복수’라는 행위가 과연 용납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작품의 감상에 큰 영향을 줍니다. 아마 다른 독자들도 그랬을 거예요. 범인은 코크릴 경감뿐 아니라 제 마음에도 깊은 울림을 남겼으니까요. 그게 워낙 범인의 인간적인 매력이 넘쳐났던 탓도 있겠지만, 거의 대부분의 독자들이 공감했을 범인의 동기는 이기적이긴 해도 보편적인 인간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복수의 칼을 갈기를 멈추라고 설득하기 위해 여기 저기 열심히 참견하느라 눈치 없이 나대면서도 유독 ‘오월이’의 복수만은 두 팔 걷어 부치고 돕고 있는 ‘사월이’의 동기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죠.
사족.
저자인 크리스티애나 브랜드는 추리소설보다 아동문학 작가로 더 유명한 사람인데, ‘엠마 톰슨 (Emma Thomson)’이 나오는 영화, <내니 맥피 (Nanny McPhee)> 시리즈가 바로 이 사람의 대표작, <유모 마틸다 (Nurse Matilda)>를 원작으로 했습니다.
그리고 추리작가로서 브랜드의 대표작인 이 작품 역시 같은 제목(Green For Danger)으로 1946년 영화화 되었습니다.
'꽃을 읽기_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각하는 식탁_정재훈-리뷰 (0) | 2016.05.02 |
---|---|
브라운 신부의 결백_G. K. 체스터튼-리뷰 (0) | 2016.05.02 |
고스트 스토리_피터 스트라웁-리뷰 (0) | 2016.05.02 |
그로테스크_기리노 나쓰오-리뷰 (0) | 2016.01.23 |
내 안의 야수_마가렛 밀러-리뷰 (0) | 2016.0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