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읽기_책

내 안의 야수_마가렛 밀러-리뷰

달콤한 쿠키 2016. 1. 9. 09:13

 

‘헬렌 클라보’는 죽은 아버지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녀에겐 집과 가족들이 있지만 자신은 낡은 호텔에 방을 얻어 따로 살고 있어요. 식구들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아 보이죠.

헬렌은 어느 날, ‘에블린 메릭’이라는 여자로부터 전화를 받는데, 스스로를 고교 동창이라고 밝히는 그 사람을 헬렌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헬렌이 에블린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보다 더 나쁜 건 그 통화가 악의(惡意)로 가득 차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예지력이 있는 듯, 헬렌에게 곧 불운이 닥칠 것이라 말하는 에블린의 말은 헬렌에게 사소하지만 ‘예사롭지 않은’ 사고로 이어지고, 결국 불안에 떨던 헬렌은 죽은 아버지의 투자 상담가였던 ‘폴 블랙쉬어’에게 조언을 구합니다. 에블린은 과연 누구이고 어떤 이유로 헬렌에게 악의를 품었을까요.

 

미국 작가 ‘마거릿 밀러(Margaret Millar)’의 대표작인 이 작품은 현대의 심리 서스펜스 장르의 개척자로 평가되는 작가의 명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지만 단순한 추리소설로 소비되기엔 아쉬운 점이 있어요. 이 작품이 넓게는 추리소설의 장르에 속해 있다고는 해도, 일반적인 ‘후던잇(Whodunit)’ 장르의 공식에서 다소 벗어나 있거든요.

살인은 비교적 늦게 (이야기의 절반이 흐른 후에야) 일어나고 용의자 물색을 비롯한 사건 해결을 위한 추리의 과정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살인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야기는 ‘인물들의 심리와 그 드라마’에 집중하며 독자들에게 궁금증과 더불어 서서히 긴장감을 쌓아 나갑니다.

도대체 왜 저러지, 싶은 에블린과, 주인공인 헬렌을 비롯한 악의와 거짓이 마구 뒤섞인 폭로와 협박의 피해자들이 등장하면, 그들 주변의 인물들이 동참하면서 악몽 같은, 작지만 촘촘하게 엮어진 그물 같은 세계가 펼쳐집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 폴 블랙쉬어의 동선을 따라 에블린의 악의적인 행각이 서서히 드러나고 독자들은 에블린과 헬렌의 기이하고 뒤틀린 과거와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치밀하게 구축된 서스펜스가 최고조에 오르는 클라이맥스에서 독자들은 에블린의 정체와 마주하며 의외의 진실에 경악하게 되죠. 이런 놀람의 정서는 여느 추리소설 못지않은 카타르시스, 혹은 독서의 쾌감을 보장합니다. 아마도 이런 장르적인 쾌감이 이 작품에 해외 추리소설 분야의 주요 상인 ‘에드가 상’을 안겨 주었던 것 같아요.

 

작가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부분은 인물의 심리입니다. 작가는 인물의 심리를 집요하리만치 그리면서도 그 문장은 무척 경제적입니다. 단 몇 줄의 문장만으로 그 사람의 인생과 뒤틀린 내면, 그들의 관계를 마치 평면도를 펼쳐 보이듯 자세히 드러내죠. 인물들을 묘사하는 데에 있어, 작가는 마치 언어로 사람의 형상을 조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독자들이 작품 속의 악인에 대해 갖는 감정은 경멸과 혐오, 증오 같은 부정적인 것들이 대부분이겠지만 그 이면엔 동정과 연민 같은 것들이 있을 거라 상상합니다. 원제처럼 ‘야수(beast)’ 같은 이 악인은 단지 거칠고 무례하고 불쾌한 사람이기 이전에 상처받은 사람입니다. 사랑받지 못하고 이해받지 못하는 경험들이 쌓이게 되면 자기 연민을 넘어서 그 증오가 외부를 향할 수 있게 되죠. 작품 속의 악인은 단순히 미치광이나 그냥 나쁜 놈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해와 동정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이런 캐릭터를 설득시킬 수 있었던 건 작가의 필력 이전에 스토리의 힘이라고 생각하고요.

 

이런 (병적인) 자기 기만(혹은 자기 부정)에 빠진 인물을 향해 주변 사람들이 관심의 시선과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과정 역시 섬세하게 전개됩니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과 가능성은 결국 무산되고 말죠. 이야기는 무척 비극적인 결말을 준비해 놓고 있는데, 군더더기 없고 오히려 성급해 보이는 엔딩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차라리 허탈한 엔딩은 ‘악마의 최후’라기보다 평생 불행했던 사람이 마침내 안식을 찾은 것처럼 보이죠. 여운이 무척 깁니다.

 

원제인 <Beast In View>를 직역하자면, ‘사정권 안의 야수’ 정도가 되겠는데, 중의적인 이 제목은 끊임없이 피해자를 찾는 악의에 찬 인물의 시선을 의미한 것일 수도 있지만, 타인에 의해 원하지 않는, 느닷없는 불행에 빠진 주인공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을 의미한 제목으로도 보입니다. 제목이 암시하듯 주변의 불행에 대해 어쩌면 우리에게 일말의 책임이 있는 게 아닐까요. 우리의 무의식은 어쩌면, 항상 타인을 표적으로 ‘겨누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족.

 

이상 인격을 소재로 했다는 점. 그리고 엔딩 등에서, 1925년에 쓰이고 33년, 영국에서만 출판된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의 단편집 <죽음의 사냥개(the Hound of Death and Other Stories>에 수록된 단편, <네 번째 남자(the Fourth Man)>를 연상하게 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이 책의 정보는 아래로...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84013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