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리코’의 언니이고 ‘가즈에’의 고교 동창입니다. 공교롭게도 유리코와 가즈에는 매춘을 하다가 살해당했는데, 동일범의 짓으로 추정되죠. ‘나’가 생각하기에 음탕함을 타고난 유리코가 몸을 팔다 죽임을 당한 것은 그렇다고 쳐도, 대기업에 다니는 커리어 우먼인 가즈에가 퇴근 후 ‘창녀’라는 일을 부업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입니다. 아직 독신이며 이젠 중년의 나이로 들어선 ‘나’는 두 여자가 어떻게 그런 죽음을 맞게 됐는지, 서로 만날 것 같지 않던 두 삶이 어떻게 ‘창녀’라는 키워드를 공유하게 됐는지 설명을 구하고 싶어 과거의 삶과 기억에 뛰어듭니다.
일본의 하드보일드(Hard-Boiled) 장르에서 독보적인 작가인 ‘기리노 나쓰오’의 이 작품은 ‘악의’와 ‘심술’의 정서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작품은 총 여덟 개의 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나’가 주로 이야기를 이끌고 있지만, 중간에 유리코의 수기와 가즈에의 매춘 일기, 그리고 두 살인사건의 가해자로 체포되어 재판 중인 중국인 불법체류자 ‘장제중’의 진술서로 이루어진 장들이 간간히 삽입되죠.
위에서 유리코의 언니이자 가즈에의 고교 동창인 ‘나’라는 인물이 두 사람의 죽음에 대해 설명하고 싶어 한다고 적었지만, 작품을 읽다보면 그런 생각은 거의 들지 않습니다. ‘나’는 유리코와 가즈에의 창녀로서의 타고난 음란함과 어쩔 수 없는 어리석음을 ‘증명’해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죠.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의 많은 부분에서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특히 ‘나’라는 인물은 믿음직한 화자가 아닙니다. ‘나’는 자신을 변호하고 상대를 깎아내리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어요. 일인칭 시점이라 어쩔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도무지 이 사람의 말을 믿어도 되나, 하는 의문이 듭니다. 가장 나쁜 것은 이 화자가 불필요하게 개인적인 감정, 즉 피해자들에 대한 증오와 모멸, 심술과 조소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입니다. 끔찍하게 생을 마감한 동생과 친구에 대한 최소한의 연민과 동정조차 없는 사람처럼 보이죠. 하지만 이런 ‘객관성의 결여’는 바로 작가가 주로 의도한 것으로 작품의 목적을 드러내는 데에 있어서 무척 효과적입니다.
‘여성의 매춘’이 작품의 중요한 모티프라면, ‘여성의 외모’, 즉 외양의 아름다움이 자신과 주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는 이야기의 중요한 동력이 됩니다. 작가가 작품 속에 그려낸 세계는 냉정하고 비열하기 짝이 없습니다.
작품 속의 세계는 남자들의, 남자들에 의한, 남자들을 위한 세계입니다. 여자들은 그들의 먹이이고 희생자이며 도구와 수단에 불과하죠. 여자들은 남자들에 의해 성을 착취당하고 폭력에 희생되며 남자들의 존재와 성공에 자신을 바치길 강요받습니다. 그럼에도 여자들은 (단지 제스처라도)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아름다움을 갈고 닦아 그 가치가 눈에 띄길 원하죠. 여자들 사이에서 서로에 대한 증오와 질투를 키우며 서로에게 반목하고 경쟁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처럼 보입니다.
‘나’는 그 게임에서 진 사람입니다. 아니, 사실은 승산이 없는 걸 미리 깨닫고 아예 싸움을 포기했죠. 이 사람은 그런 경쟁에서 한 발짝 떨어져 방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누구 못지않게 그 경쟁의 중심부에 있는 사람입니다. 칼을 들고 싸우는 대신, ‘악의’와 ‘심술’을 갑옷처럼 두르고 서로를 이간질하고 투지를 빼앗으며 자신의 모략에 몰락하는 모습들을 즐기고 있어요. ‘나’의 이런 태도는 패배의식과 열등감으로 깊어진 자기연민의 결과로 보이고 그것은 자신 외부의 거의 모든 것, 특히 여자들을 그 표적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오롯이 모두 ‘나’의 잘못일까요.
작가의 상상이 빚어낸 픽션이지만, 이 작품은 어느 정도 사실에 근거합니다. 90년대 말, 자국인 일본을 떠들썩하게 했던 ‘동경 전력 여사원 매춘부 살인사건’을 모델로 했다는 이 작품의 후기에서 작가는 자신이 그 사건에 강하게 매료됐던 이유가 단순히 ‘낮에는 커리어 우먼, 밤에는 창녀’라는 소재가 주는 센세이셔널리즘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 이면의, 남성 중심 사회에서의 여성, 즉 인간으로서의 여성이 아닌 소모품으로서의 여성을 이야기하고 싶었겠죠.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여성들이 이용당하고 성을 착취당하는 과정, 그들에 대한 폭력과 그들에게 강요당하는 희생, 그것이 정당화되는 문화와 사회 시스템의 오류, 나아가 가부장의 폭압에 대한 고발, 여성들의 외모가 소비되는 현실과 그것을 종용하는 사회, 재물이 종교가 된 현실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작품 속의 세계에서 여성의 외모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이 안의 여자들은 모두 아름답거나 못생겼거나 두 범주에 반드시 속합니다. 두뇌가 좋은지 나쁜지, 어떤 개성과 어떤 자질을 가졌는지는 별도인데, 그런 개인적인 특징은 외모의 영향 아래에 있습니다.
유리코와 자매인 ‘나’는 스위스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입니다. 동생인 유리코가 ‘혼혈’의 장점을 두루 갖춘 눈부신 미인이라면 ‘나’는 그렇지 못해 평범한, 오히려 못생긴 외모에 가까운 사람이죠. 그래서 어려서부터 끊임없이 동생과 비교당한 ‘나’에겐 심한 외모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열등감은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과 욕망을 넘어선 집착에 가깝습니다. 그 집착은 자라면서 점차 심해져 아름다움에 대한 광신이 되고 동생에 대한 비상식적인 증오로 변질됩니다.
반면 유리코는 그 눈부신 미모로 행복했을까요. 유리코는 색다르고 평범하지 않은, 엄마와 아빠 모두 닮지 않은 외모로 정체성을 잃은 사람입니다. 어렸을 때 경험한 소속감의 상실은 누구에게 소속되고 싶다는 열망을 낳고, 이에 동반된 외로움을, 유리코는 타인을 통해, 그것도 ‘섹스’라는 수단으로 해소하고자 합니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육체를 도구로 삼은 것은 남자들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찰나의 실수였지만 유리코의 삶에 가장 강력한 유혹이었다는 것은 두 말 할 나위가 없죠.
볼품없이 깡마른데다 못생긴 가즈에는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고자 끊임없이 한계에 도전하는 사람입니다. 학업이나 외모나 모두 노력에 따라 성취될 수 있다고 믿지만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에 오히려 타인들로부터 놀림을 받고 왕따가 됩니다. 제 노력에 의해 결국 부러지고 마는 가즈에는 학교나 직장에서 우수한 성과를 거두지만 여자이기에, 더군다나 육체적인 매력이 없어서 회사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믿게 되면서 퇴근 후의 매춘 행위에 빠져듭니다. 그것을 통해 가즈에가 원했던 것은 진실한 인간관계나 타인의 인정, 관심이나 사랑 같은 정서적인 것이었지만 그 욕망들은 바로 ‘자유’에의 갈망으로 표출됩니다. 하지만 위로받기는커녕 오히려 더 깊어지는 가즈에의 공허감은 이 사람으로 하여금 몸을 파는 대상에게 ‘다정하게 대해 달라’고 요구하게 됩니다. 가즈에의 입에서 나오는 그 절절한 부탁을 들을 때, 독자들은 깊은 아픔을 느끼게 되죠.
외모가 그런대로 그럭저럭인 ‘미쓰루’는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공부에 매진합니다. 비교적 균형이 잡힌 이 사람도 나중엔 사악한 종교 빠져 살인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여생을 살게 됩니다. 미쓰루의 자신감 결여는 평범한 가정환경에 기인하는데, 이 결핍은 작품의 주된 배경인 ‘Q 여고’의 세계에서는 외모 만큼이나 치명적입니다. ‘부유함=외모’의 공식은 Q 여고의 세계에선 의문을 갖거나 도전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이런 잘못된 믿음은 개척자이면서도 자본에 대한 맹신으로 살인자가 된, 사랑을 가장한 폭력적인 남성성의 상징인 인물, 장제중을 통해서도 보입니다.
장제중이 추구했던 ‘돈은 곧 자유’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보편적인 믿음의 오류는 ‘기지마’ 선생의 편지에 언급된 ‘닻’이 상징하는 잘못된 믿음에 대한 경고로 연계됩니다. 작품 속 인물들의 불행은 어쩌면 자신에 대한 잘못된 믿음 때문은 아니었는지, 그것이 있는 한 어떤 노력도 어떤 가치관의 변화도 소용없다고 작가는 경고합니다.
‘나’가 동생의 그늘 아래 평생을, 추한 악의를 품고 고통스럽게 사는 것도, 유리코가 찰나의 쾌락에 평생을 맡긴 것도, 가즈에의 삶이 안착하지 못하고 영원히 떠돌게 된 것도, 미쓰루의 광신이나 장제중의 살인도, 어쩌면 그런, ‘자신에 대한 그릇된 믿음’ 때문이 아니었는지 말이죠.
이 작품은 흥미진진한 범죄 소설이지만, 그 이전에 아이러니로 가득 찬 현실을 고발하는 사회 소설로, 심리분석의 다양한 텍스트를 제공하는 심리 소설로, 여성 인권, 성의 착취와 폭력을 고발하는 페미니즘 소설로도 읽힙니다.
특히 사회소설로서의 기능은 가장 눈에 띄는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Q 여고’의 모습은 과열 경쟁으로 언제나 긴장이 넘치는 현대 사회의 축소판입니다. ‘내부 학생’과 ‘외부 학생’의 명백한 구분, 그들 사이에 암암리에 흐르는 권력 다툼과 내부 학생을 향한 동경과 질투, 외부 학생들 사이에서의 지나친 경쟁과 왕따 등의 갈등은 ‘스탠포드 감옥 실험 (SPE; Stanford Prison Experiment, 영화 <엑스페리먼트>의 소재)’으로 유명한 ‘필립 짐바르도’가 그의 저서 <루시퍼 이펙트>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필립 짐바르도 박사의 말을 빌자면, 인간의 나쁜(폭력적이고 범죄적인) 행동은 개인적인 자질보다 외부의 조건이나 상황들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데, 나쁜 시스템(Q 여고의 경우엔 나쁜 관습)은 규칙과 법규, 역할 등을 내세워 상황적 힘을 만들어 내고, 익명성과 탈개인화를 조장하여 개인들로 하여금 개인의 정체성보다 공동의 정체성을 만들어내게 합니다. 그 ‘공동’이란 집단은 외집단(out-group)의 사람들을 내집단(in-group; 권력이 집중된)으로 끌어들여 덩치불리기에 급급하고 그 과정에서 ‘내집단’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비인간화, 타자화가 생기는 사회적 역학은 폭력과 범죄를 조성하고 방임하기에 충분한 조건이 됩니다.
나쁜 시스템과 나쁜 상황 속에서 평범하고 일반적으로 선한 사람들이 저지르기 쉬운 행동, 반응적 오류에 대해서도 박사는 고발하고 있는데, 익명성을 통한 탈개인화(스스로의 정체성을 단체의 정체성에 흡수시켜 혼자 있을 때보다 여럿이 있을 때 나쁜 행동이 보다 수월해지는 경우), 상대를 자신과 다른 종으로 타자화시켜버리는 비인간화(쟤는 인간도 아냐), 집단 동조와 권위, 권력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다수의 타인들이 하고 있는 나쁜 행동을 나도 따라서 하게 되는 경우) 등을 저자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스템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수방관하고 있는 이유를 작가는 작중 인물인 ‘장제중’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항을 하고 싶어도 우선 돈을 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돈이 없으면 살 수가 없으니까요. 데모나 연좌 농성 같은 것을 하고 있다가는 굶어 죽습니다.」 (본문, 365쪽)
이쯤 되면 작가 ‘기리노 나쓰오’가 희망은커녕 악몽의 뫼비우스 띠 위에 독자들을 남겨놓는 결말을 가진 이 작품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무엇이었는지 상상하게 됩니다. 그건 바로, 지나친 경쟁에 매몰된 나머지 주위에 눈을 돌릴 잠시의 겨를도 없는 현실에서 “가끔은 져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때때로 우린 한 번의 실패를 겪으며 영원한 낙오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영원한 패배가 아닌, 그저 누구나 살면서 몇 번은 겪게 되는 ‘흔한 일’, 혹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위로가 적극적으로 필요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과연 행복을 위해 어떤 조건들을 갖춰야 하는 걸까요.
픽션의 인물이지만 유리코와 가즈에의 명복을 빕니다.
도서 정보는 아래로...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70126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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