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읽기_책

고스트 스토리_피터 스트라웁-리뷰

달콤한 쿠키 2016. 5. 2. 06:48


우리나라 호러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편인 ‘피터 스트라웁(Peter Straub)’은 자국인 미국 내에서는 꽤 인지도가 있는 모양입니다. 미국 현대 호러의 대가인 ‘스티븐 킹(Stepen King)’이나 ‘딘 R. 쿤츠(Dean R. Koontz)’ 등과 어깨를 견준다고 하니 말이죠.

‘황금가지’에서 ‘밀리언셀러 클럽’이라는 이름으로 낸 문고 시리즈에서 이 작품을 발견한 건 아주 최근이었습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작가의 출세작이고 81년에 ‘프레드 아스테어(Fred Astaire)’와 ‘멜빈 더글라스(Melvyn Douglas)’ 같은 배우들을 내세워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모양이에요. 두 권으로 나뉜 800쪽이 넘는 방대한 양에 인물들도 많아 메모를 해가면서 읽어야 했습니다. 고생한 보람이 있냐고요? 글쎄요. 다 읽었다는 것에 의미를 두는 편이 낫겠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작품의 방대한 양과 많은 등장인물에 반해 이야기는 빈약합니다. 이야기의 무대는 가상의 도시 ‘밀번’. 그 지역에서 어느 정도 부와 명성을 누리고 있는 노신사 다섯 명이 결성한 ‘차우더 클럽’이라는 모임이 있습니다. 거창하게 들리지만 연세 지긋한 노인들이 때가 되면 모여서 벽난로 불 옆에서 (특이하게도) 귀신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런 모임이죠. 모임의 주된 화제인 귀신 이야기는 주로 자신들이 겪은 이야기인데, 언제부턴가 회원들은 자신들이 같은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그 악몽의 비밀을 풀기 위해 갑작스럽게 죽은 ‘에드워드’의 조카이면서 호러 소설가인 ‘댄’을 모임에 초대하게 됩니다. 댄의 호러 소설 속에서 악몽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알고 보니, 차우더 클럽의 오총사들은 모두 과거에 어떤 죽음과 연관되어 있었고 그 우연한 죽음의 희생자였던 ‘에바 겔러’는 댄과도 관련이 있었음이 드러납니다.



소설들을 읽다 보면 이야기가 독자를 끌고 가는 작품들이 있는가 하면, 독자들이 이야기를 따라 가는 작품들도 있습니다. 무 자르듯 재단할 기준도 없고 어느 쪽이나 장단점이 혼재하며 어떤 것이 좋은 작품인지는 분명하지는 않겠지만, 차이는 존재합니다.

‘개인적으로’ 일상적이고 드라마틱한 요소들이 다분한 작품들은 이야기가 저를 끌고 다니는 것이 좋습니다. ‘아, 이럴 때 이럴 수도 있겠구나’, ‘이때에 이런 행동을 하다니, 과연’,하는 극대화된 간접 경험을 할 수 있어서죠. 어느 정도의 비약이나 과감한 생략도 감당할 수 있고 작품에의 개입을 위해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해도 괜찮은 거죠.

반면, 수수께끼나 비밀의 요소들이 많거나 반전이나 의외의 결말을 의도하고 있는 작품들은 제가 이야기를 끌고 가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런 작품에서는 꽤 적극적으로 작품에 개입하게 되는데, 이야기의 비약은 ‘튐’으로 여겨 방어하게 되며, 인물의 엉뚱한 말이나 행동은 공감을 깎아내는 요소로 간주하며 ‘왜?’라는 질문에 집중합니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였어요.



시작은 좋았어요. 여자 아이를 납치한 댄을 보여주는 프롤로그는 의문으로 넘쳤고, 밀번으로 무대를 옮긴 후 차우더 클럽의 노인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일상에 도사린 긴장감이 좋았죠. 인물들 각자의 관점으로 진행되는 드라마도 흥미로웠고요. 하지만 노인들의 악몽이 등장하고 댄을 모임에 초대하는 순간부터 ‘밀번의 공포’는 코미디가 되고 맙니다.

일군(一群)의 사람들이 의미심장하면서도 공통된 악몽을 반복적으로 꾸고 있다고 칩니다. 사람들은 모여서 그 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간헐적이지만 꾸준한 그 악몽이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죠. 그도 그럴 것이 그 사람들은 과거에 한 여자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었고 그로 인해 걱정과 두려움, 죄책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꿈은 불길한 예지몽일 수도 있고 어떤 악령과 관계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그것이 ‘저주’라고 믿게 됩니다. 드디어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과 만납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누가 도울 수 있을까요.


가장 그럴 듯한 사람은 엑소시즘에 능한 신부가 있습니다. 목사나 스님이라도 괜찮고요. 과거의 죽음에 관련된 거라면 그 여자의 실종이나 죽음을 수사했던 경찰관일 수도 있어요. 아니면 축사(逐邪)의 능력이 뛰어난 영매일 수도 있고요. 클리셰이긴 해도 설득력은 있습니다. 하지만 저주와 악몽으로 고통 받는 노인들을 도와줄 사람으로 호러 소설가는 아닙니다. 아무리 차우더 클럽의 한 회원과 친척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은 아니죠. 그 소설가와 저주의 주체와의 관계도 한참이나 나중에 밝혀집니다.

그 순간부터 감정이입의 여지가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작품을 읽는 내내 ‘왜?’라는 질문에 시달리는 통에 이야기에 도무지 집중이 어려워졌으니까요.



문제는 그 외에도 많습니다. 인물들의 믿을 수 없는 동기와 공감이 가지 않는 행동, 앞뒤가 다른 설명, 일관성의 부재, 심한 비약, 불필요한 죽음들과 뜬금없는 이야기 전개, 정체 모호한 악역들, 난데없고 허무한 결말, 기타 등등.

특히 악역들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습니다. 이들은 대체 정체가 뭔가요. 늑대인간이나 흡혈귀, 좀비 등의 특성을 두루 갖춘 이것들은 무척 독창적일 수 있었겠지만 작품 속에서는 이도 저도 아닌 것들이 되어 버립니다. 그토록 강력하고 무서운 존재들이 한낱 브로치 핀 하나로 무력해지는 것이 말이 됩니까. 게다가 그 갑작스러운 결말은 또 어떡하고요.


‘앞뒤가 다른 설명’에 대해 예를 들자면, 이런 겁니다. ‘피터’는 폐쇄된 기차역에서 ‘프레디 로빈슨’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피터는 프레디가 집에서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죠. 이쯤 되면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않다는 말 아닌가요.


게다가 이름 짓기 놀이를 하고 있는 악당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일관성이 없는 설정이나 묘사도 마찬가지죠. 예를 들게요. 수십 년 동안 여러 가지 정체로 모습을 나타내는 그 악당은 마치 자신을 드러내는 데 안달이 난 것처럼 자기 이름에 ‘A. M.’ 이란 이니셜만 고집합니다(알마 모블리, 앤-베로니카 무어, 에이미 멍튼, 앨리스 몽고메리, 안나 머스틴, 앤지 몰, 기타 등등). 마치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하지만 이 악당은 애초에 ‘A. M.’이란 이니셜과는 아무 연관도 없는 ‘에바 갤리’라는 이름으로 소개됩니다. 그리고 작품 안에서 언급된 밀번의 주민들 중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동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평안해 보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악당의 동기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요? 한을 품었으면 저주의 대상만 괴롭히면 됩니다. 이건 뭐 무차별 학살도 아니고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들은 왜 죽이는 거죠? ‘무관심도 죄다’라는 테마를 의도했다고 쳐요. 하지만 이걸로는 모자랍니다. 동기가 모호하니 별로 무섭지도 않은 거죠.



게다가 이 작품의 세계관도 편협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 작품이 그리려고 하는, 호러 장르와 판타지 장르가 만나는 세계가 남성 중심적이고 기독교 중심적이며 미국 중심적이라는 사실은 이야기가 다양한 독자들을 유혹하고 그들의 정서를 건드리고 주인공들의 위기와 모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이 작품은 여성 비하적인 시선으로 미국 밖의 국가와 문화를 거의 미개인 수준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일요일마다 교회를 다니는 미국 국적의 남성 독자들이라면 감상이 약간 다를 수 있겠지만요.



작가가 한 편의 이야기를 짓는다는 사실은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 세계에서 만큼은 작가가 조물주와 다름없으니, 자신의 편의대로 그 세상을 계획하고 설정한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 안의 삶은 작가가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인물들의 삶에 작가로서 개입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놀이판만 벌여주고 자기들끼리 실컷 놀도록 놔둬야죠. 작가의 개입은 이야기를 맥 빠지게 합니다. 이 작품처럼요. 작가가 편리한대로 진행하는 이야기는 생명이 없는 조화(造花) 같죠. 작가는 편했을지라도(절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읽는 독자들은 꽤나 불편하다고요.



사족.

세계 제일의 강대국 미국에서 잘 나가는 축에 드는 작가가, 그것도 자신의 대표작으로, 아시아 변방의 작은 나라에 사는 ‘듣보잡’ 독자에게 이렇게 씹히는 이유에, 아마도 번역도 한 몫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한 문학 작품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작업이 엄청난 작업이라는 사실을 짐작 정도는 하고 있고, 또 무슨 ‘번역상’을 받을 정도의 수준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끊어놓는 건 문제가 있지 않나요. 게다가 70년대의 ‘대한 늬우스’를 연상하게 하는 그 신파조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