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은 어려서부터의 ‘절친’인 ‘데비’의 자살이 석연치 않습니다. 유서도 없는데다 전날 밤에 만났을 때만 해도 그런 조짐은 전혀 없었거든요. 도저히 친구의 자살을 믿을 수 없는 레인은 친구들과 동생을 모아놓고, 데비와 즐겨 하던 ‘위자보드’로 자살한 친구의 영혼을 불러냅니다. 그런데 위자보드에 응답한 것은 데비가 아닌 다른 영혼이었고 그 후로 친구들이 차례로 죽어나가면서 레인은 위기에 빠집니다.
‘위자보드(Ouija Board)’는 알파벳과 숫자, ‘Yes’, ‘No’ 등이 새겨진 나무판 위로 유리컵 따위가 움직이는 철자를 따라 죽은 영혼과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도구입니다. 원래 서양의 강신술(降神術)에서 영매들이 영혼과의 접촉을 시도하는 도구였지만 요즘엔 (우리도 잘 아는) 일본의 ‘분신사바’처럼 놀이로 취급되는 것 같아요.
이 영화의 취약점은 바로 이 소재에 있습니다. 위자보드가 최초로 소개된 19세기 말엔 어땠을지 몰라도, 요즘의 사람들은 그것을 ‘놀이’로 취급하죠. 분신사바처럼 일종의 ‘유희’란 말입니다. 그걸 갖다 놓고 아무리 진지한 척, 무섭다고 소란을 떨어도 관객들은 하나도 심각하지 않다는 겁니다. 위자보드가 영화에 나오는 것은 사실 크게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소재가 이야기에 어떻게 사용되는지는 문제가 되죠. 위자보드 없이 진행 자체가 불가능한 이런 이야기를 ‘호러’로 받아들일 관객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죽은 친구와 영적인 교감을 시도하다가 난데없는 악령을 깨운 주인공이, 그로 인해 엄청난 고생을 한다는 이야기 자체만 본다면 큰 무리는 없습니다. 친한 친구의 느닷없는 자살은 남은 친구들에게 큰 충격이었을 테고, 우리의 주인공들은 그 이유를 알기 전까지는 친구를 완전히 보낼 수가 없는 거죠. 이런 동기는 괜찮습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려면 그 죽음을 이해하고 인정해야 하는 과정(암이었대, 혹은 교통사고였어, 같은)이 필요하니까요. 하지만 ‘위자보드’라뇨. 엄청난 충격과 슬픔에 빠진 사람들이 모여 분신사바 같은 것을 하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그게 호러 영화의 한 장면입니까. 시트콤의 납량 특집이죠.
소재가 갖는 영향력이 약하니, 이야기에 힘이 실리는 것은 무리입니다. 귀신은 괜히 사람들을 죽이고, 주인공은 비밀을 풀고 살아남기 위해 갖은 애를 쓰지만 시나리오의 꼭두각시처럼 보입니다. 호러 장치들은 진부하고 플롯은 평범하며 악령을 물리치는 클라이맥스는 다소 시시하죠. 하지만 악령의 정체에 관한 반전은 괜찮았다고 생각해요. 그나마 러닝타임동안 영화 앞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열심히 연기하는 배우들에 대한 예의와 그럭저럭 괜찮은 연출, 거기에 악령에 대한 호기심 덕이었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그런 부분에 있어 영화는 더 파고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가능성이 있는 소재를 홀대하고 있어요.
미국에서 내년 개봉을 목표로 <위자 2>가 기획 중이라고 합니다. 속편인지 프리퀄인지는 모르겠어요. 프리퀄 같은데, 아마도 귀신의 속사정에 대해 할 이야기가 더 있는 것 같아요. 저 역시 이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의 생사보다 귀신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더 궁금했거든요.
이 리뷰를 쓰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만약 배경이 우리나라고, 분신사바나 위자보드가 아닌, ‘굿’이 소재였다면 어땠을까요. 죽은 친구를 위한 진혼굿을 올리다가 나쁜 영혼이 나타난다는 스토리였다면 제 감상이 달라질 수 있었을까요.
영화의 만듦새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 영화보다는 약간 심각하고 무섭게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불신지옥> 같은 영화처럼요. 아마 ‘소재의 차이’ 이전에 ‘문화의 차이’일 거라고 생각해요. 제 편견도 어느 정도 작용할 것이고 말이죠.
사족.
‘안병기’ 감독이 <분신사바>란 영화를 만들었었죠. 이 영화도 망한 이유가 비슷한 데에 있지 않을까요. 중국에선 시리즈로 제작될 정도로 흥행이 됐었다고 합니다만.
첫 시퀀스에서 데비가 목을 매달아 죽는 장면은 <서스페리아 (Suspiria)>의 한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아마 ‘다리오 아르젠토 (Dario Argento)’에 대한 ‘오마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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