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구에 철철 넘치는 에너지, ‘초딩’ 수준의 호기심과 리액션이 트레이드마크인 정신과 전문의 ‘이라부’는 이 소설집의 주인공입니다. 이라부와 짝을 이루는 ‘마유미’는 간호사로, 관능적인 외모에 언제나 핫팬츠 차림을 하고 나타나죠. 두 사람은 이 소설집에 실린 다섯 편의 이야기에 공통적으로 등장하지만 실제적인 주인공들은 따로 있습니다.
총 다섯 편의 이야기가 실린 이 연작 소설집은 독특한 인물들로 독자들을 사로잡습니다. 이라부와 마유미 콤비에 버금가는 다섯 명의 실질적인 주인공들 또한 상상을 초월하는 고민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뾰족한 물건만 보면 오금이 저리는 야쿠자 중간 보스, 번번이 공중 곡예에서 실패하는 베테랑 곡예사, 근무하는 병원의 원장이자 장인의 가발을 벗기고 싶은 젊은 의사, 신인 선수에 대한 질투로 슬럼프에 빠진 야구 선수와 전에 이미 썼던 이야기를 또 쓰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걱정이 들 때마다 토악질을 해대는 여자 소설가 같은 인물들이 자신의 고민을 토로하러 이라부를 찾아옵니다.
환자들이 겪는 갖가지 강박 증세들은 이 시대, 우리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섯 편의 작품들은 기이한 강박증에 시달리는 인물들을 내세워 독자들로 하여금 현대인들의 가식, 우리 자신도 모르게 외부를 향해 높이 쌓아 올리는 높은 벽, 고립, 나이를 먹으면서 잃어가는 순수함과 자연성, 자신에 대한 애정과 신뢰, 스스로를 갉아먹는 시기심, 성공적인 인생을 위해 희생되는 삶의 진정한 가치들을 돌아보게 만들죠.
저마다 깊은 감동이 있고 페이소스가 넘치며, 유머 또한 잃지 않고 있는 매 작품마다, 독자들은 기행에 가까운 이라부의 모습에 어이없는 실소를 흘리다가도 어느새 진솔한 이야기에 공감하게 됩니다. ‘나도 저런 모습이겠지’ 하는 생각에 약간 서글픈 생각도 들죠. 어쩌면 우리들 모두는 어느 정도의 강박증을 앓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요.
삶이, 그리고 생활이 우리를 아무리 재촉해도 스스로에게 시간을 내어줄,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고 옆사람을 품에 안을 여유를 조금은 부려도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이라부라는 인물은 가까운 친구가 아니더라도 인사를 나누고 지낼 만큼의 이웃으로서 몹시 탐나는 사람입니다.
작품마다 등장하는 이라부의 역할은 특이합니다. 이 사람의 ‘처방’은 치료가 목적인 행동이 아니라 그냥 아무 생각 없는 ‘주책’처럼 보입니다. 이라부의 그런 행동이 주책을 가장한 의도적인 치료인지, 아니면 제멋대로인 행동이 운 좋게도 맞아떨어져서 치료 효과를 보는 것인지 궁금해진단 말이죠.
그것이 의도된 치료든 주책이 맞아떨어진 우연이든 이라부의 기행은 이야기 속에 잘 스며듭니다. 철없는 주책바가지 같은 이라부의 행동을 함께 겪는 환자들은 그 모습에서 자신의 고민과 불행에 대한 실마리를 찾게 되고 삶의 통찰을 얻어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환자들 ‘스스로’ 자신을 보살피게 된다는 겁니다. 누구의 도움 없이, 오직 이라부의 주책바가지 같은 행동을 힌트로 말이죠. 작품 속 이런 설정이 와 닿는 이유는 우리가 겪는 문제를 바로잡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우리 자신 뿐’이라는 믿음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각성 역시 이 작품집의 미덕이라고 생각해요. 작품집 어딘가에 나온 대로, 이라부는 어쩌면 인간들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요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요. 아니, 어쩌면 작가인 ‘오쿠다 히데오’가 요정일 지도 모르는 일이죠.
이 소설집이 전하는 메시지는 이라부의 캐릭터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솔직하고 단순하게 살라’는 거죠. ‘솔직하고 단순한’ 사람을 ‘주책바가지’ 같은 단어로 표현하고 있으니, 일단 저부터 솔직하고 단순한 것과는 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슬픈 일이죠.
이 작품집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단편과 중편 사이의 어중간한 길이에 소설 작품으로서의 완벽한, ‘기-승-전-결’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의 구조를 공부하고 있는 분들에게 꼭 읽어보라 권하고 싶어요. 재미도 있고 각각의 작품 모두 재미도 있고 분량도 적당하니, 부담은 별로 가지 않을 겁니다.
작가인 ‘오쿠다 히데오’는 2012년에 임순례 감독이 만든 영화, <남쪽으로 튀어>의 원작자입니다. 이 사람의 저작물 리스트를 보니, 장르가 뒤죽박죽이네요.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작품을 쓴다니 부럽습니다.
‘이라부-마유미’ 콤비를 내세운 다른 작품집이 몇 권 더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번역 출판되어 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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