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희의 단편입니다.
살아보지도 못한 시대에 대한 노스탤직(nostalgic)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입니다. ‘전후의 인천’이란 배경은 작품에 독특한 분위기를 부여합니다. 전쟁 후의 가난과 혼란, 그럼에도 굴하지 않는 삶에의 의지가 잘 전해집니다. 부둣가를 배경으로 외국의 이방인들과 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이 눈에 그려집니다. 작가의 언어를 깎고 빚은 문장들 덕이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묘사가 좋았습니다.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작품입니다. 이야기 안에 나오는 여자들은 죄다 불행하거나 그 불행에 눈을 뜨지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상대적 성(性)인 남성에 의한 불행(할머니)이기도 하지만 시대가 낳은 산물(매기 언니)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적극적이고 도발적인 오늘날의 ‘페미니즘 문학’의 기준엔 미치지 못하지만, 나름의 목소리로 그 시대를 산 여성들의 아픔을 헤아리고 그 고된 삶을 어루만진다는 점에서 ‘여성 문학’의 범주에 넣어도 무방하리란 생각이 듭니다. 작품 속의 화자(나)는 같은 여성으로서 이들의 불행에 공감을 하며 성장합니다.
성장소설로서 이 작품의 화자인 ‘나’가 갖는 성장의 증후는 삶의 비밀에 대한 호기심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고통 받는 여성으로서의 삶도 결국은 삶의 범주에 드는 문제입니다. 삶의 총체적인 고민에 눈을 뜬다는 것은 삶에 대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어머니가 여덟 번째 아이를 낳는 산고의 비명을 지를 때, 성당의 종소리(죽음)가 오버랩되어 들리고 그 순간에 ‘나’에 의한 할머니의 진정한 매장 의식이 비로소 행해진 것처럼, 삶과 죽음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삶이 죽음이듯 죽음도 다른 의미의 삶이며 고통 역시 곧 삶이고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작가는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위로는 힘들고 고달픈 (여성들의) 삶을 보듬으려는 용기마저 느껴집니다. 작품의 이런 기개는 육이오 전쟁의 영웅인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짓밟고’ 올라서는 ‘나’의 행동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작품 속, ‘언덕 위의 이층집’에 사는 창백한 얼굴의 중국인은 의문의 남자입니다. 이는 정확한 실체를 갖춘 현실의 사람일 수도 있고, ‘나’의 상상 속의, 혹은 환각 속의 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이 남자는 명확하지 않은 제 존재만큼 신비한 역할을 부여받습니다. 이 낯선 이방인은 ‘나’의 성장을 촉진하고 자극합니다.
환상의 존재로서 이 남자는 ‘나’의 (술에 취하고, 어른에게 막말을 하고, 목숨을 잃은 고양이를 모욕하는 행동에 대한) 죄의식과 수치심을 자극하여 ‘정신의 각성’을 부추깁니다. 현실의 존재로서 이 남자는 (이성애의 관점에서) 설렘의 대상(성적 대상)으로서의 남성으로 ‘나’의 ‘성적인(육체적인) 각성’을 촉구합니다. 이 남자에게서 빵(육체의 양식)과 작은 용등(빛, 지혜, 정신의 양식)을 선물 받은 ‘나’는 초경(일종의 성인식)을 치릅니다.
작품 속에서 독자들은 인간으로서의 성숙과 삶을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이 나뉘어 있다고 보고 있는 작가의 관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나’의 성장이 그렇고 ‘나’가 할머니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도 그렇습니다. 평생을 소외되고 사랑받지 못한 여성으로 불행하게 살다 간 할머니의 생(生)에 이입한 ‘나’는 할머니와 육체적으로 이별을 하고 한참이나 지난 후에 할머니의 ‘정신(보잘 것 없는 유품들)’을 땅에 묻습니다. 이 소소한 매장의식은 할머니에게 진정한 이별을 고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도축장에서 생을 마칠 소, 칼을 맞은 고양이, 추락사한 메기 언니가 흘린 피, 여덟 번째 아이를 낳는 어머니의 출산혈, 그리고 주인공이 맞는 초경 따위에서 작품 전반을 꿰뚫고 있는 ‘피’의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 피들은 고통의 피, 희생의 피, 생명의 피, 성장의 피입니다. ‘피’에 그 상징과 의미가 여럿 있듯이, 작가는 삶의 다양한 양상들을 있는 대로 받아들이라 조언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양갈보’라는 단어로서 ‘타자화’ 시키지 않고, ‘메기 언니’, 혹은 ‘제니의 엄마’로 ‘인격화’ 하고 있는 작가는 우리 모두의 삶에는 ‘그늘과 빛’이 공존하고 있으며 어느 생명 하나 허투루 생긴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오정희의 소설을 (여러 의미에서) 제대로 읽었습니다. 개인의 내면에 침잠한 사소설을 쓰는 작가라는 편견이 있었는데, 작품 전반에 삶에 대한 통찰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사족.
왜 하필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었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단순히 ‘인천’을 상징하는 지형지물 이상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해서요.
전쟁이란 인류 최대의 범죄이고 그것을 기획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바로 남자’라는 사실, 그리고 그 피해자가 대부분 ‘여성들’이라는 사실로 미루어 본다면, 한국 전쟁의 영웅이라는 맥아더는 ‘여성들을 상대로 행해지는 남성들의 폭력’을 상징하는 인물이 아닐는지요. 그 인간을 기리는 동상을 밟고 올라서 인천을 관망하는 ‘나’의 모습을 그리면서 작가는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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