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이 좋아했던 TV 외화시리즈, <미녀와 뱀파이어(Buffy, the Vampire Slayer)>에 한 에피소드가 기억납니다. 한 학급에 거의 왕따 비슷한 여학생이 자신의 몸이 점점 사라지는 경험을 합니다. 극의 중반쯤에 그 학생은 투명인간이 되는데, 마음에 들지 않던 친구들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다가 점점 그 수위가 걷잡을 수 없는 폭력으로 치닫게 된다는 얘기였죠.
그 에피소드는 학교 폭력이나 왕따 문제를 이야기한 것 같지만 그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문제의식이 약간 다릅니다. 그 여학생을 괴롭혔던 건 학우들의 따돌림이 아니라 바로 ‘무관심’이었어요.
폭력과 부정에 눈과 귀를 닫고 입을 다무는 태도는 결국 그것에 동조하는 것이란 말이 있지만, 때때로 무관심이야말로 직접적인 폭력보다 더 잔혹한 경우를 우리는 실제로 많이 봅니다. 난무하는 폭력과 비리, 부정에 대한 무관심은 그것을 방관하는 것 자체만으로 우리를 ‘공범’으로 만들고 타인에 대한 무관심 역시, 우리를 잠재된 폭력의 가해자로 만듭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이라는 후회는 이미 늦는 거죠. 우리는 우리 주변의 그늘과 그 안에 내재된 위험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음으로서 모종의 악(惡)에 주체로서 동참하게 됩니다.
‘조이스 캐롤 오츠(Joyce Carol Oates)’의 작품집 「악몽(the Corn Maiden & Other Nightmares)」은, ‘악몽’ 이상으로 무서운, 오히려 꿈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끔찍한 현실을 조명합니다. 이야기 속의 비극은 존재에 대한 무관심, 그로 인한 고독과 외로움에서 파생됩니다. 작가는 외롭고 소외되고 관심과 애정에 갈증을 느끼며 그로 인한 시기와 질투, 열등감에 시달리는 한편, 역설적인 허영심과 적의가 내면화된 인물들을 통해 믿을 수 없지만 있을 법하고 상상할 수 없지만 어딘가에서 틀림없이 일어나고 있는 비극적인 삶의 다양한 양상들을 보여줍니다.
<베르셰바>는 두서없고 비논리적이며 난해한 상징으로 가득 찬 ‘악몽’이라는 표제에 가장 잘 어울립니다. 독자들은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과연 누구의 기억이 진실인지(혹은 왜곡되었는지) 알지 못한 채, 한 남자에게 가해지는 무차별한 폭력을 목격합니다. 과거 폭력의 피해자와 가해자가 역전되는 이 복수라는 행위는 인물들의 과거와 기억들이 정확히 설명되지 않아 그 실체가 더욱 모호합니다. 분명한 것은 ‘브레드’나 ‘스테이시’ 모두 단란한 가정을 바랐지만 적절한 관심과 애정을 받지 못해, 혹은 자격 미달로 그 꿈이 좌절됐다는 사실 뿐입니다. 두 인물의 육체적인 충돌은 두 사람의 ‘기억’의 충돌입니다. 납득의 근거가 부족한 일방적인 기억에서 비롯된 폭력은 누구의 편에 서야할지 애매한 독자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듭니다. 이야기의 엔딩은 독자들을 나쁜 꿈을 꾸는 잠에서 깨는 것이 아닌 더 깊고 더 음침한 꿈의 미로로 안내합니다.
2011년, 세계 환상문학 대상 최우수 단편으로 선정된 <화석 형상>은 이란성 쌍둥이 형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탐욕과 증오, 이기심과 혐오로 똘똘 뭉쳐진 ‘에드거’가 가해자라면 폭력에 시달리는 동생 ‘에드워드’는 소외되고 열등한 피해자입니다. 자신의 살과 피, 오롯이 자신의 것이어야 할 부모의 애정을 동생에게 빼앗겼다는 에드거의 질투는 이해할 만하며, 그 폭압에 너무나 무기력해 오히려 달관한 초인처럼 보이는 동생에 대한 의연함 역시 수긍이 갑니다.
짧은 분량 안에서 쌍둥이 형제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그 일대기를 관조하고 있는 이 작품은 경제적이고 시적인 서사가 일품입니다. 끈끈한 혈연으로 얽혀 있지만 폭력과 시기가 전부인 관계에서 비롯된 형제의 비극이라는 소재, 싸늘하지만 슬픈 정서, 피의 인력, 아무리 밀어내도 멀어지지 않는 ‘가족’이라는 주제, 사랑 받는 것과 인정받는 것에 대한 고찰을 담아낸 수작입니다. 우리의 ‘망부석 설화’를 연상시키는 형제의 기괴한 죽음은 ‘또 다른 삶’을 상징하는 것 같아 의미심장합니다.
역시 쌍둥이 형제가 등장하는 <알광대 버섯>은 도덕성은 거의 빵점이지만 매력적인 형 ‘얼래스터’를 죽이고 싶어 하는 쌍둥이 동생 ‘라일’의 이야기입니다. 라일이 품고 있는 살의는 그 증오의 이면에 형에 대한 질투와 동경, 애정, 더불어 형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엿보여 흥미롭습니다.
얼래스터가 허영과 거짓, 과장된 욕망과 용기, 세속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외면의 세계를 사는 남자라면, 라일의 세계에서는 겸손과 소박함 같은 내면의 덕목이 더 중요합니다. <화석 형상>과 같이 이 작품의 형제 역시 엔딩에서 죽음을 맞는데, 불에 타 서로 엉겨 “어느 시체가 어느 쪽인지 밝혀낼 수 없는(본문 118~119쪽)” 모습에서 인간의 완전한 행복은 외면과 내면 모두, 어느 한 쪽 치우침 없이 고루 성장해야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얼래스터와 라일은 함께 죽음으로서 ‘형제’라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기괴한 죽음에 부여된 의미심장한 의미와 함께, “하지만 죽음은 당연히 삶보다 큰 거잖아. 죽음은 삶을 감싸니까. 짧은 인생의 시간이 오기 전에 존재하는 공허, 그 뒤에 나타나는 공허”라는 문장(본문 73쪽)은 죽음에 대한 작가의 담론처럼 들립니다.
<머릿구멍>은 ‘개공술’이라는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의사(擬似)행위로 환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루카스 브레드’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루카스 브레드 박사는 경쟁에서 지고 서열에서 뒤쳐져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은 불행하고 열등한 남자입니다. 동시에 그는 타락과 세속을 겪을 만큼 겪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뇌압을 낮추거나 질병의 원인이 되는 ‘악령’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두개골에 작은 구멍을 뚫는 시술인 ‘개공술’을 원하는 환자의 고집은 그런 브레드의 (잘 나갔던) 과거로의 회기, 지루하고 힘든 현실로부터의 탈피, 동시에 순수함에 대한 열망을 자극합니다. 위험하고 허무맹랑한 시술인 줄 알면서도 그 요구에 응하는 브레드의 어리석은 행동은 타인의 절실한 요구를 들어줌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 받고 싶어 하는 ‘관계’ 안에서의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무도 내 이름을 몰라>는 작가의 다른 작품집, 「여자라는 종족」에 실린 <밴시, 죽음을 알리는 요정>과 그 구조가 흡사합니다. 작가는 아홉 살 아이의 천진한 이기심과 질투, 순수하게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감정, 반응을 통해 현실과 환상을 아우르며 아이의 비행(非行)을 무서울 정도로 세밀하게 보여줍니다. .
자신이 독차지해야 마땅한 부모의 관심을 빼앗아간 동생에 대한 질투에 시달리는 ‘제시카’는 갓 태어난 동생의 이름을 단 한 번도 불러주지 않음으로 그 동생을 외부의 완전한 객체로서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실제의 존재인지 아니면 부정적인 감정이 투영된 환상인지 모를 “엉겅퀴 솜털처럼 숨결 같은 털을 가진 회색 고양이(본문 185쪽)”의 존재는 그런 제시카의 내면을 상징합니다.
‘가족’이나 ‘혈연’의 의미와 상식에 대한 반전을 시도한 이 작품은 앞서 소개된 두 작품, <화석형상>이나 <알광대버섯>과는 정반대의 메시지를 담아낸 것이 흥미롭습니다.
<도움의 손길>의 주인공 ‘헐린’은 사랑하고 존경하던 남편이 죽자 슬픔과 상실감에 어쩔 줄을 모르는 미망인입니다. 친절하고 다정한 헐린이 원했던 것은 죽은 남편을 대신할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돌봐주고 의지할 수 있으며 외롭지 않게 곁에 있어줄 사람을 원했던 헐린의 선택은 결국 그릇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상이군인인 ‘니컬라스’는 헐린의 요구에 응할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요.
‘니컬라스’는 악인은 아니었습니다. 그 역시, 전쟁이라는 국가의 폭력에 희생된, 꿈이 꺾이고 희망이 좌절된 실패자였습니다. 헐린은 타인의 연민을 거부하면서도 니컬라스를 동정하는 실수를 범합니다. 니컬라스에게 헐린은 단지, 아름답고 부자에다가 최근에 남편을 잃은 ‘발정난 암캐’였을 수도 있습니다. 헐린의 호의는 ‘진심어린 공감’이 아닌 ‘싸구려 동정’으로 전락하고 진정한 애정이 필요한 헐린과 진정한 애정을 받은 적이 없는 니컬라스는 자신에 의해, 그리고 서로에 의해 고통 받게 됩니다.
표제작이자 대미를 장식하는 <옥수수 소녀, 사랑이야기>는 이 작품집의 유일한 중편입니다.
작가는 ‘유아 실종’이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범죄 심리, 인간의 고독과 외로움, 욕망과 질투, 진실과 거짓, 참된 인간관계에 대한 고찰을 다이내믹하게 담아내는데, 특히 범죄의 동기가 충격적입니다. ‘주드’는 외롭고 버려지고 소외되고 방관되며 아무에게도 적절한 관심을 받지 못해 생긴 엄청난, 악마적인 파괴력이 내재된 인물입니다. 주드는 이야기 안의 다른 어떤 인물보다 가장 참혹하고 지독한 희생을 강요당합니다. 주드는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탐하고 타인을 시기했다는 이유로 처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1995년부터 2010년 사이에 작가가 발표한 단편과 중편 작품들 중, 작가 스스로가 선정한 작품들로 꾸며진 이 작품집(2012년 ‘브람 스토커 상, 최우수 작품집 부문 수상)이 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의 고독과 외로움’입니다. 누구나 ‘관계’ 안에서 자신의 의미를 확인받고 타인의 존재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합니다. 스스로를 인지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파악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원하는 ‘행복’의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고요.
여기 실린 작품들의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모두 행복해지길 바랍니다. 타인의 애정과 관심을 얻으려 고군분투하고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며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런 욕망과 바람은 때론 너무나 지나치거나 너무나 모자라서, 혹은 환경이 그것에 부응하지 못한 이유로 그들은 위기에 빠지거나 스스로가 위험한 인물이 됩니다. 그런 결말이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의 대가라고 하면 너무 혹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그 고생을 했으면서도 진정 행복해지는 인물은 이 작품 안에서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결말이, 이 작품집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오히려 현실에 더 가깝다면 너무 비관적인 감상일까요.
그게 아니라면 이야기의 엔딩 이후에 뭔가 다른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걸까요? 작가가 진짜 엔딩을 보여주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그 끝을 숨겨놓는 이유도 비슷할까요? 그것이 해피엔딩인지, 새드엔딩인지 알고 싶으면 더 살아보는 수밖에 없다는 거, 이왕 사는 거 열심히, 행복하기 위해 살아보라는 거. 그것이 삶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진실일까요.
사족.
“모두 알았다고 해서 전부 용서할 수 있는 건 아니죠. 모두 다 알면, 알아낸 사실 때문에 되레 역겨울 수도 있는 거예요.(본문, 448쪽)
마음을 울리는 문장이 있어서 옮겨봅니다. 무엇이 진실인지, 그것을 마주하기 위해 우리에게 엄청난 용기를 요구하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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