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벽돌 공장의 높은 굴뚝 위에 위태롭게 올라서, 누구에게나 무거운 ‘철공’을 하늘을 향해 던지는 난장이의 모습에서, 그 많은 하루를 단순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기어코 ‘살아내고 마는’, 우리의 남루하고 악착같은 모습이 보입니다.
난장이는 시대를 막론하는 모든 소시민들의 상징입니다. 이 작품이 쓰였던 그 때, 그 과거의 시기에, 작가와 동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삼촌은 물론이고 지금을 사는 우리의 이웃들과 바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삼십 년 전에 쓰인 작품이 여전히 젊은 독자들의 공감을 사는 것에 대해 작가가 슬픔과 안타까움을 토로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노작가의 한숨이 위로가 됩니다.
2.
열두 개의 단편들로 구성된 소설집이지만 이 이야기들의 세계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난장이 ‘김불이’를 가장으로 둔, 그의 아내와 그 슬하의 삼남매가 주축이지만, 때때로 그들의 이웃이, 그들의 고용주가, 혹은 그들의 친구들이 이야기를 끌어갈 때도 있습니다.
주인공, 혹은 화자를 달리하며 열두 편의 이야기에 변화를 주고 있지만 이 작품집을 한 편의 장편소설로 대한다고 해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가 이야기를 이끌건 작가가 보여주려 한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가난하고 힘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을 ‘소시민’이라 통칭하지만 절대다수인 그들의 삶을, 사회에 대한 그들의 희생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작가의 바람이 읽힙니다.
어쩌면 어린 ‘영수’가 숙제로 그렸던 ‘생태계의 피라밋’처럼, ‘돈 없고 빽 없는’ 소시민들의 삶은 자연계의 식물들을 닮았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 인간들은 ‘무기물에서 유기물을 스스로 합성하는’ 자연의 능력을 (날기를 잊어버린 도도새처럼) 자진해서 퇴화시켰는지도 모릅니다. 작금의, 어쩌면 인간의 문명의 시작과 함께 했을 ‘착취’의 역사는 우리 스스로에 의해 자행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교육의 문제, 시스템의 문제, 정책과 정치의 문제이기 이전에, 많은 사람들의 상실과 고통과 슬픔은 ‘인간성’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이 작품집은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주제로 귀결되는 듯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과 사회, 국가가 깨어나야 한다지만 그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계급’이란 단어는 언제나 존재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 단어가 갖는 첫 번째, 그리고 가장 포괄적인 의미는 ‘균형’을 전제로 합니다. ‘조건이나 수준이 비슷하거나 동일한’ 상태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정작 계급을 결정짓는 것은 ‘이해와 방식’의 차이여야 합니다. 그러니 무거운 쪽이 있다면 가벼운 쪽도 있다느니, 더 가진 자가 있으면 덜 가진 자도 존재해야 한다는, 그러므로 착취하는 사람이 있으므로 착취당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요즈음의 계급이란 단어는 불평등과 불균형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곧 차별과 착취를 정당화 시키곤 합니다. 우리 인간들에게 차이는 있되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편견처럼 차별은 근거 없는 폭력을 양산합니다. 그 폭력은 육체적인 것은 물론 정서적인 것도 포함합니다. 더 나쁘고 더 무서운 건 그 폭력이 종종 합리화되고 당연시 되는 풍토가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폭력에 익숙해지면 그것은 더 이상 폭력이 아니게 됩니다. 작가는 이런 사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그 경고는 오늘날까지 유효합니다.
3.
이 작품집을 읽으면서 처음엔 대단히 슬프다고 느꼈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감정의 그 질감이 약간 달랐습니다. 억울하고 답답한 느낌이 많았습니다. 한참을 달리다 낭떠러지를 만난 것 같은. 열심히 길을 찾다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것 같이 먹먹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잡을 수 없는 무지개란 생각에 무릎이 꺾이는 좌절감울 느꼈습니다. ‘살아 숨 쉬는 지금 이 순간’이 절대 행복한 순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생겼습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며, 작은 행복에 만족하라’는 말이 더 이상 위안은커녕, 오히려 무서운 저주, 사악한 최면처럼 느껴졌습니다.
표제작인 중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한 가정이 돈과 무자비한 권력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낱낱이 해체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육교 위에서>는 ‘유혹’을 ‘협박’이라 표현하는 ‘비겁함’을 이야기하며, 마주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각자의 궤도를 돌면서 항상 서로를 보고 있지만 막상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도 없는 두 별에 관한 <궤도 회전>에선 ‘피상성’의 허점을 경고합니다.
뚜렷한 이야기나 극적 구성이 보이지 않아 작품집 안에서 ‘다리’ 역할을 하는 <기계 도시>, <은강 노동 가족의 생계비>,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등의 작품들은 이 나라 그 시절의 노동 현실에 관한 생생한 리포트입니다. ‘그 시절’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작품 속에서 까발려진 비루한 사정은 지금, 오늘에까지 변한 것이 거의 없어 보입니다. 특히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에서 보이는 약자들끼리 대립하고 견제하는 모습은 요즘 말로 ‘웃픕니다’. ‘경제 원리’, ‘생산과 분배의 원칙’에 대한 담론처럼 읽히는 <클라인씨의 병>은 왜 노동자들이 분발하여 용기를 내야하는지, 그들의 무관심을 일갈합니다.
하지만 분명, 작가는 독자들이 현실에 좌절하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겁니다. 작가는 좌절에 빠져 그것을 피하고자 찾아내는 잘못된 방법들 또한 우리를 또 다른 좌절로 이끌 수 있다는 경고(<우주여행>)를 하면서 타성에 물든 이기적인 마음에 약하게 깃드는 양심의 빛을 통해 위로를 건네기도(<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엄연히 ‘계급’은 다르지만 그것을 초월하는 ‘이웃’의 힘, ‘연대’의 힘이란 존재를 통해 좌절을 극복할 방법을 제시(<칼날>)하기도 합니다.
프롤로그 격의 작품인 <뫼비우스의 띠>의 그 제목은 앞면과 뒷면이란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 기하학적인 입체 도형입니다. 뒤에 나오는 작품 제목으로 사용된 ‘클라인의 병’ 또한 내부와 외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작가는 이 사회가 극도로 양분화 되어 가고 있는 현상을 더 이상 방관하지 말라고 종용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갑’과 ‘을’로 구분되어 서로 반목하는 게 당연한 듯이 보입니다. 이 작품집에 대한 작가의 기본적인 모토는 ‘협력과 분배’입니다.
4.
‘악’은 여러 병폐를 낳습니다. 하지만 그 악은 개인적인 ‘탐욕’의 부산물에 불과합니다. 노동자 탄압에서부터 크게는 전쟁까지, 그 많은 범죄들을 기획하고 있는 극소수의 권력자들은 ‘자본’에 의해 움직입니다. 돈이 제안하고 돈이 결정하며 돈이 행동합니다.
요즘 미디어들이 쏟아내는 뉴스들은 온갖 비리, 범죄, 질투와 증오 같은 것들뿐입니다. 우리가 정말 이런 세상에 살고 있는 걸까요? 우리에게 ‘사랑’이나 ‘희망’ 따위는 한낮 구시대의 가치에 지나지 않게 되어버린 걸까요?
작품들 곳곳에 포진된 판타지적인 요소들은 작가의 기교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행복이 한낱 ‘공상’이 아님을 바라는 작가의 기원임에 틀림없습니다. ‘톨스토이’의 질문처럼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지’, 그 대답을 우리 세대에, 우리 스스로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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