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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메리 클리프트(Montgomery Clift)’가 연기하고 있는 ‘존 크쿠로비치’는 정신외과 의사입니다. 가망 없는 정신병자들의 난폭한 성향을 ‘대뇌 절제술’이란 수술로 간단히 제거할 수 있다고 믿는 젊은 의사죠. 능력도 있고 의욕도 있는 엘리트이긴 하지만 연구비 원조는커녕, 턱없는 예산으로 운영하기만도 버거운 직장은 그의 미래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던 존에게 최근에 어마어마한 유산을 상속받은 ‘바이올렛’이라는 여자로부터 제안이 들어옵니다. 그 미망인은 정신병을 앓고 있는 자신의 조카에게, 존이 연구 중인 수술을 시술하는 조건으로 어마어마한 금액의 보조금을 제시합니다. 돈이 필요한 존은 그녀의 조카를 진찰하기로 하지요.
하지만 존은 미망인의 조카인 ‘캐더린’에게서 자신이 생각하던 미치광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캐더린은 겁에 질려 있고, 어마어마한 사건으로 정신적인 외상을 입은 상태입니다. 게다가 바이올렛과 캐더린 사이엔 묘한 갈등이 존재하고, 그 갈등은 1년 전 여름, 외국에서 사망한, 바이올렛의 아들 ‘세바스찬’이라는 공통된 분모를 갖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몽고메리 클리프트나, ‘캐서린 헵번(Katharine Hepburn)’, ‘엘리자베스 테일러(Elizabeth Taylor)’의 영화이기도 하고, 우리에게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나 <클레오파트라(Cleopatra)>등의 역사극으로 잘 알려진 ‘조셉 맨키비츠(Joseph L. Mankiewicz)’의 영화이기도 하지만, 이 음울하고 기묘한 이야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사람은 원작자인 ‘테네시 윌리엄스(Tennessee Williams)’입니다.
이 영화는 원작자의 각본 참여로 연극적인 특징이 두드러집니다. 한정된 공간, 길고 상징적인 대사, 과장된 연기, 그리고 명암을 강조하는 조명 등은 모두 윌리엄스의 희곡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어두운 정서와 불쾌한 감상은, 절대적으로 원작의 힘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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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적으로 이 영화는 미스터리의 플롯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선 죽음이 있고, 그것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는 상반된 진술자들이 있고, 그 모순을 풀어야하는 탐정이 있습니다. 해결에 이르는 방식엔 긴장감이 약간 떨어지지만, 엔딩에선 놀랄만한 비밀도 폭로되고요. 특히 중요인물들 모두 모인 자리에서 진실이 밝혀지는 장면은 추리소설에서 즐겨 다루는 엔딩과 흡사하지요.
영화는 세바스찬의 죽음 그 자체보다는 세바스찬이라는 인물에 집중됩니다. 바이올렛이 기억하는 세바스찬은 유순하고 낭만적이며 다소 마마보이 같은 구석이 있는 사랑스럽고 똑똑한 아들입니다. 하지만 캐더린이 알고 있는 세바스찬은 전혀 다릅니다. 세바스찬은 저돌적이고 이기적이며 자신의 목적에 타인을 이용하는 약삭빠른 사람이었죠. 게다가 세바스찬은 언제나 욕정에 굶주린 색정광이었습니다. 과연 어떤 모습이 ‘진짜 세바스찬’일까요.
세바스찬은 이야기가 다루거나 품고 있는 모든 것의 시발점이지만, 그의 존재감은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의 영화 <레베카(Rebecca)>에서, 타이틀 롤인 레베카와 닮았습니다. 세바스찬은 이름만 언급되거나 이미 죽었다는 이유로 화면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의 존재는 그림자처럼 영화 전체에 드리워져 있습니다.
바이올렛의 아들이고 사촌인 캐더린과 애인이면서 성공한 시인이었던 세바스찬은 설명이 철저하게 통제된 캐릭터입니다. 관객들은 이 인물이 갖고 있는 다양한 정신분석의 재료들로, 혹은 영화 속의 암시와 힌트들로 추측을 할뿐입니다.
실질적으로 관객이 세바스찬을 목격하는 부분은 엔딩의 플래시백뿐입니다. 캐더린의 회상과 독백을 통해 전달되는 그의 최후는 마치 원시 종교의 어떤 의식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상징적이고 강렬한 그 장면에서 세바스찬은 의식을 위해 제물로 바쳐지는 희생양처럼 보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이 영화의 핵심처럼 보입니다. 영화는 ‘사랑’을 모티프로 삼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 그것도 ‘관계’ 안에서 더불어 존재하는 게 아닌, 광활한 우주 안에서 홀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외로운 존재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세바스찬은 어머니와 올바른(좋은) 관계를 맺는 것에 실패한 듯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관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세바스찬은 오롯이 혼자 존재합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그에게는 힘이 듭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밖에 존재하는 타인들을 두려워합니다. 타인에 대한 무지(無知)는 수많은 편견과 소외, 배척의 감정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오늘 날, 현대 사회처럼 바쁘고 정신없는 세계에서 사람들은 삶의 각박한 무게를 전가하기 위해 희생양을 필요로 합니다. 자신의 삶의 영역 밖에 존재하는, 잘 모르는, 알고 싶지도 않은 존재가 부지불식간에 희생양으로 선택됩니다.
영화는 세바스찬을 순결한 양(羊)인 듯 흰색과 햇빛으로 묘사합니다. 그의 죽음은 살인도, 순교도, 이타적인 죽음도 아닌 ‘강요된 희생’처럼 보입니다. 누구보다도 세바스찬을 잘 알고 있었던 캐더린도 비슷한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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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취향으로 본다면 그리 역동적인 영화는 아닙니다. 카메라의 움직임은 거의 없고 쇼트도 긴 편이며 인물들의 대사는 시(詩) 같습니다. 게다가 영화에 등장하는 무대라고 해봤자 바이올렛의 웅장한 저택과 존이 근무하는 병원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배우나 감독들이라면 꺼려했을 이런 것들이 이 영화에서는 묘한 매력과 개성으로 작용합니다.
감정 싣기도 버거운 긴 대사들은 많은 은유와 상징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도입부의 바이올렛과 존의 대화, 엔딩의 캐더린의 독백은 인상적이죠.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대립하게 된 두 여자의 상황과 심리는 삶의 권리, 자연의 횡포, 죽음에 대한 두려움, 신(神)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 삶과 죽음에 대한 자연의 이치 같은 철학적인 메시지들의 알레고리로 읽힙니다.
무대가 되는 공간들 역시 상징적입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원시림을 닮은 세바스찬의 정원은 바이올렛의 표현대로 ‘에덴동산’입니다. 하지만 정작 그 정원의 주인인 세바스찬은 자신이 너무나 원초적이고 솔직한 나머지, 아직 선과 악의 개념이 없는 자신의 정원에서 오히려 고달팠습니다. 에덴동산의 사악한 뱀 같은 타인들은 자신들의 모호한 기준으로 선과 악을 나눕니다. 세바스찬은 그들에 의해 평가 받고 판단 당하고 자신의 본질을 저울질 당합니다.
존이 근무하는 정신병원이라는 공간 역시 인상적입니다. 정상과 비정상이 공존하는 그곳의 환자들은 정말 모두 미쳤을까요? 의사들과 간호사들은? 그들은 모두 제정신인 걸까요? 자신도 모르게 미친 사람들만의 공간으로 발을 들여놓은 캐더린은 어떤 공포에 사로잡혔을까요?
그곳의 환자들은 모두 공식적인 광인들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오직 캐더린 혼자입니다. 하지만 다수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소수는 희생을 강요당합니다.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공격할 준비가 되어있는 요즘의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정신병원이라는 공간은 상당한 의미를 갖습니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모호하듯, 옳고 그름의 경계도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가끔은 명백히 옳은 것들이, 오직 소수의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오해되고 왜곡되는 것이 현실이니까요.
아들의 정원에서 '끈끈이주걱(Venus Fly Trap)'에 파리를 먹이던 바이올렛이 왜 이런 식충식물 따위의 이름에 미의 여신이 등장하는지 궁금해 하며, ‘아름다운 것은 위험하다’는 해석을 내놓습니다. 이는 두 사람의 평범하지 않은 모자(母子) 관계를 상징하는 중의적인 의미로 해석됩니다. ‘가족’이라는 관계 안에서도 희생양의 존재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특히 고압적인 모친과 순종적인 자식 사이에서는 더욱 있을 수 있는 일이고요.
여러 면에서 이 작품은 공공연한 동성애자였고 작가로서의 공적인 삶을 제외하곤 대부분(특히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불행했던 원작자, 테네시 윌리엄스의 불평이 아니었을까, 하는 감상도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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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1960년)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Best Actress)을 놓고 두 여배우(캐더린 헵번과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맞붙을 정도로 배우들의 연기가 인상적입니다.
캐더린 헵번이 연기한 바이올렛은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입니다. 가장 난폭하기도 하고요. 그녀는 모종의 목적을 위해 질녀를 희생시키려고 합니다. 차갑고 냉정한 바이올렛은 목적 외엔 눈길도 주지 않습니다. 바이올렛은 살인자이고, 협잡꾼이며, 질투와 복수의 화신입니다. 돈을 미끼로, 조카에게 위험한 수술을 강요하는 바이올렛의 동기는 아들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사랑입니다.
리즈 테일러가 연기하는 캐더린은 겁에 질린 희생양입니다. 그녀는 사랑한다고 믿었던 세바스찬에게서도, 자신의 고모에게서도 이용당하고 짓밟힙니다. 그것도 모자라 미친 여자 취급을 받게 되죠. 하지만 캐더린은 희생양의 스테레오타입에 갇혀 있기를 거부합니다. 현실적인 캐더린은 세바스찬의 본질을 이미 꿰뚫어 봤고, 자신이 다가갈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캐더린은 용기와 의지에 의리까지 겸비한 여자입니다.
두 여자의 캐릭터에 반해,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연기한 존은 인상적이라기보다 ‘계산된’ 캐릭터입니다. 영화에서 이 사람이 끼어들 공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존은 두 여자의 드라마를 위해 존재하는 인물입니다. 다소 왜소한 체격을 가진 이 배우는 약간 어눌하고 소극적인 캐릭터를 연기할 때가 가장 잘 어울렸던 것 같은데, 이 영화에서도 그는 제 몫을 합니다. 이 배우의 팬들은 이 영화가 실망스러울지도 모르겠지만요.
사족
언젠가 영화 커뮤니티에서 이 영화를 퀴어 영화라고 소개했다가 어느 유저로부터 된통 야단을 맞은 적이 있습니다. 자신은 동성애자들에 대해 관대하며 그 사람들을 이해하는 편이지만 이 영화가 퀴어 영화일 리가 절대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퀴어 영화 따위로 취급해서 불쾌하다는 것이 그 유저의 의견이었습니다. 이후로 게시판은 댓글에 또 댓글로 시끌벅적했지만 먼저 입을 닫은 것은 저였습니다. 일단 그 유저의 의견에 큰 모순이 있으며, 남이야 이 영화를 코미디로 보든 에로 영화로 보든 개인의 감상에 참견하는 꼴이 더 큰 모순으로 보였기 때문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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