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폴래팩스(Emily Polifax)’는 60대의 미망인입니다. 장성한 두 자녀는 독립했고 폴리팩스 부인은 권태로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매주 화요일에는 병원에서 책을 실은 수레를 밀고 다니는 봉사활동을 하고, 수요일에는 붕대를 돌돌 감는 활동을 하고, 목요일 아침에는 미술협회 모임, 오후에는 병원의 기념품 가게를 지키고, 금요일에는 원예클럽 모임, 토요일 오전엔 미용실에 들르고 오후엔 친구가 차를 마시러 오는(16~17쪽)’ 것이 일상인 폴리팩스 부인은 우울증 치료로 찾아간 의사에게서 조언을 듣게 됩니다. ‘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못 한 일’에 도전해 보라는 의사의 말에 고무된 폴리팩스 부인은 다음 날, CIA가 있는 워싱턴으로 떠납니다. 어렸을 때부터의 꿈인 ‘스파이’가 되기 위해서죠. 폴리팩스의 꿈은 이루어질까요? 과연 노부인은 어떤 모험을 하게 될까요?
‘에밀리 폴리팩스’라는 스파이 스릴러의 주인공이지만 ‘이안 플레밍(Ian Fleming)’의 ‘제임스 본드(James Bond)’나 ‘존 르 카레(John Le Careé)’의 소설 속 인물과는 다릅니다. 60대의 노부인이라는 점에서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의 ‘미스 제인 마플(Miss Jane Marple)’을 떠올리게 하지만 온 몸으로 역경을 뚫고 나간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오히려 크리스티의 <엄지손가락의 아픔(By the Pricking of My Thumb)>과 작가의 유작, <운명의 문(Postern of Fate)> 속에 나오는 ‘노년의 프루던스 ‘터펜스’ 카울리(Prudence ‘Tuppence' Couwley)’에 가깝죠. 두 인물 모두 낙천적이고 용감하며 삶을 사랑합니다. 삶 자체가 모험이니, 폴리팩스 부인이나 터펜스나 천직(天職)에 종사한다고 볼 수 있죠.
이 책의 저자인 ‘도로시 길먼(Dorothy Gilman)’은 에밀리 폴리팩스를 주인공으로 한 열네 편의 장편을 발표했습니다. 이전에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young adult)을 위한 소설들을 썼지만 작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준 것은 폴리팩스 시리즈였죠. 이 작품은 그 시리즈의 첫 권으로, 이른바 에밀리 폴리팩스라는 인물을 세상에 소개하는 데뷔작입니다.
그래서인지 흥미롭고 굵직한 사건, 미스터리 소설의 백미인 의외의 결말 같은 것들은 별로 보이질 않습니다. 대개 폴리팩스 부인의 묘사와 활약에 치중되는데, 전체 분량의 반 이상이 탈출담입니다.
사실, ‘중국공산당’이나 ‘마이크로필름’ 같은 건 소위 맥거핀(MacGuffin)입니다. 폴리팩스 부인을 멕시코로 보냈다가 위험에 빠뜨리고 납치당하게 만들고 알바니아를 탈출하게 만드는 핑계죠. 폴리팩스 부인은 미스 마플 같은 명탐정 부류는 아니라 무릎을 치는 추리의 과정은 없지만 이 인물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독특한 개성을 부여받습니다. 적과도 쉽게 친해지고 자신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죠. 또한 유머 감각이 뛰어나고 기지와 재치가 넘쳐 위기의 상황을 모면할 줄도 압니다. 그리고 다소 엉뚱하기도 한 매력은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사람 좋은 동네 할머니처럼도 보이고요.
‘공산당’이니, ‘첩보전’이니 하는 말들에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발표된 66년의 세계정세를 염두에 둔다면 그런 단어나 설정이 이해가 됩니다. 물론 ‘첩보전’이란 단어는 현재에서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긴 하죠.
작품 안에서 미국과 소련은 사상으로 대립되어 상대를 (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 ‘주적(主敵)’으로 여기며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작품 안에서 모든 인물은 그저 평범한 보통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누군가의 형제며 누군가의 친구죠. 폴리팩스 부인을 감금하고 총구를 겨누는 사람들조차 그저 자신의 직업에 충실히 종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념과 사상보다 더 한 감옥이, 독단과 아집만큼 더 한 지옥이 없다는 생각이 새삼 듭니다. ‘주적’이라는 단어를 일상에서 너무나 흔하게, 그리고 너무나 쉽게 접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우리들에게도 동정이 가고요. 세계는 변해 가는데 유독 우리만은 개미지옥에 빠진 파리 꼴을 하고 있으니까요. 대체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할까요.
도로시 길먼의 폴리팩스 시리즈는 ‘코지 미스터리(Cozy Mystery)’라는 서브 장르(그 아래, ‘코지 스파이 스릴러’라는 장르는 따로 없는 것 같으므로)로 분류되는데, 경찰이나 전문 수사요원이 아닌 평범한 소시민을 주인공을 일상 속의 미스터리를 독자들과 함께 푼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또한 폭력과 섹스의 묘사가 거의 없고 유머가 풍부하며 주로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한여름 밤, 무더위를 시원하게 식혀줄 등골 서늘한 읽을거리보다 한겨울, 이불 속에서 귤 까먹으면서 읽을 만한 작품인 거죠. 이런 작품 분위기에 어울리게, 이 작품이 영화화 되었을 땐 TV시리즈 <제시카의 추리극장(Murder, She Wrote)>의 주인공, ‘앤젤라 랜스버리(Angela Lansbury)’가 에밀리 폴리팩스로 분했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폴리팩스 부인과 앤젤라 랜스버리의 모습이 오버랩됐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더라고요.
이 책 이후로 같은 출판사에서 <폴리팩스 부인; 미션 이스탄불(The Amazing Mrs. Polifax, 70년 작>과 <폴리팩스 부인과 여덟 개의 여권(The Elusive Mrs. Polifax, 71년 작>을 차례로 냈습니다. 아마도 출간 이력대로 출판할 예정인가 봅니다. 좀 더 봐야겠지만요.
사족.
1. ‘인생’에 관한 기막힌, 너무나 공감이 가는 구절이 있어 여기에 옮겨봅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무엇을 선택하든 알 수 없는 것에 도박을 거는 일이지요. 그리고 선택의 자유가 있으니 우리가 인간인 거고요. 우리에겐 미래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인생이란 지도와 다를 바 없는 것 같습니다. 방향도, 경로도 끊임없이 선택해야 하니까요.(352쪽)』
삶은 힘들지만, 여러모로 흥미진진한 것 같아요.
2. 코지 미스터리 장르가 궁금하시다면 여기로. 영문 위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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