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읽기_책

하드보일드 에그_오기와라 히로시-리뷰

달콤한 쿠키 2017. 12. 20. 07:38


추리소설의 관습 중의 하나가 바로 명탐정 옆을 지키는 ‘조수’의 등장입니다. 명탐정의 역할이 어느 정도 틀에 박힌 데에 반해, 이 조수의 역할은 다양한 변주가 가능합니다.

작품의 전체적인 ‘톤(tone)’과 ‘매너(manner)’는 안에서 어떤 종류의 범죄가 보이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되겠지만, 디테일적인 면에서는 두 주인공이 어떤 시너지를 발하느냐에 적잖은 영향을 받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기와라 히로시(荻原 浩)’의 이 작품에서도 자칭 명탐정 ‘슌페이’와 할머니 조수 ‘아야’의 콤비가 등장합니다. ‘레이몬드 챈들러(Raymond Chandler)’의 광팬이며 ‘필립 말로(Phillip Marlowe)’를 동경하지만 들어오는 사건이라고는 잃어버린 애완동물을 찾는 일 뿐인 슌페이는 인내심 빼고는 명탐정과 거리가 멀며, 아야 역시 ‘왓슨’이나 ‘헤이스팅즈’ 같은 역할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죠. 하지만 이 두 사람의 앙상블은 이 유쾌한 이야기에 아주 잘 어울립니다.


이 작품은 주인공 콤비의 역할 덕에 ‘코지 미스터리(Cozy Mystery)’의 분위기가 강합니다. 시종일관 유머와 재치가 흐르며 슌페이와 아야는 탐정 콤비가 아닌, 만담꾼처럼 보일 때가 많죠.

하지만 아무리 독자들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책장을 술술 넘긴다고 해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범죄는 사뭇 진지합니다. 작가는 오늘날 ‘반려동물 문화’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며 자연과 인간에 대한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많던 시베리안 허스키는 다 어디로 갔을까. 세상의 개들의 수는 유행에 따라서 변한다. 완구나 인테리어와 마찬가지다. 참 제멋대로다. 동물이 좋다는 사람은 많지만 동물은 과연 사람을 좋아할까. (본문, 138쪽)」



개는 충성스러운 동물입니다. 자신을 키워주는 사람을 믿고 따르고 거의 전적으로 의지하죠. 위험에 빠진 주인을 구하는 개의 이야기는 심심찮게 들리는 뉴스입니다. 말도 못하는 동물이 충정과 의리를 보였다는 점에서 ‘사람보다 낫다’는 말들은 빠지지 않습니다.

모두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개를 좋아합니다. 곁에 두고 친구나 가족처럼 삼고 싶어 하죠. 하지만 오늘날 인간들의 환경이 개를 가깝게 두기에 적합하지 않은 경우가 많은 탓에 사람들은 개가 더 이상 짖지 못하도록 성대를 자르고 ‘미용’이라는 미명 하에 털을 깎고 염색을 시킵니다. 개를 위한 것이 아닌, 인간을 위한 수술이고 미용처럼 보입니다. ‘견주’, 혹은 ‘주인’이라는 단어가 암시하듯 개는 인간들의 소유물이 됐습니다.


인간은 자연을 일찌감치 ‘소유’해 버렸습니다. 인간이 집단을 이루고 문명이 발현한 순간부터 인간은 자연을, 이 지구를 소유하게 됐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키우는 개를 ‘가족’이라고 주장하면서 소유하려 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을 ‘내 것’이라 여긴다면 그건 올바른 애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개는 ‘자연스러움’을 잃게 되고 인간들의 소유물, 액세서리 같은 처지로 전락하고 말죠.

인간처럼 개도 자연의 일부분입니다. 그것들만의 ‘자연스러움’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어떤 수를 써도 사라지지 않는 야성은 전혀 다른 형태로 발현되고, 가끔 유혈 사태로 이어지는 사건들 역시 요즘 익숙한 편이죠. 그런 개에게 사람들은 주홍 글씨처럼 ‘나쁜 개’, ‘미친 개’, ‘사나운 개’, ‘무서운 개’라는 낙인을 찍어버리고요.

어쩌면 가장 큰 문제는 우리 자신들, 바로 인간에게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그 생각에 동의하는 것 같죠. 위험한 존재는 개가 아니라 바로 인간입니다. 이 작품의 범죄자처럼요.


이 작품에서 다루는 범죄의 동기는 물론 ‘개’입니다. 정확히 ‘개’가 아니라 개에 대한 ‘사랑’ 때문이죠.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행해지는 범죄는 무수합니다. 여기에도 문제는 사랑 자체가 아니라 바로 우리, 인간들에게 있습니다.

범인은 개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무시무시하고 잔인하며 비인간적인 폭력으로 표출합니다. 개를 향한 사랑이 너무나도 큰 나머지 인륜도 천륜도 저버리죠. 그런 범인은 악마와 다름없습니다.


반려견을 둔, 적잖은 사람들이 개를 키우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로 ‘외로움’을 듭니다. 또는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에 지쳐서, 또는 자신만을 봐줄 어떤 존재가 필요해서, 기타 등등.

하지만 대부분의 견주들은 개의 외로움이나 개와 다른 개와의 관계, 그 개의 어미나 새끼는 물론 그 개를 사랑하게 될 또 다른 개의 존재에 대한 가능성은 무시합니다. 그리고 스스로가 무조건적인 사랑과 믿음을 ‘줄 수 있는’ 대상을 찾는 데엔 인색합니다. 그러면서 개를 사랑한다고 말하죠. 개도 그것을 원할까요? 원한다고요? 확실한가요?

‘개’라는 동물에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고양이는 어떤가요? 도마뱀이나 토끼, 애완용 쥐는? 헤엄칠 바다를 빼앗긴 아름다운 열대어들이 좁은 수조 안에서 행복할까요? 햄스터는 우리 안에 갇혀 쳇바퀴 돌리는 제 삶에 만족할까요? 새장 속의 카나리아는 무용지물이 된 날개가 짐스럽진 않을까요?

길고양이 문제로 사람들이 골머리를 썩이고 있습니다만, 그 대부분의 원인은 인간들에게 있습니다. 넘쳐나는 유기묘들에 대한 실효성 있는 대책이라고 해봐야 중성화 수술이 유일합니다. 지구 상 다른 종의 생식의 권리를 강제적으로 빼앗고 번식을 차단하려는, 그런 끔찍한 짓을 하려는 종은 인간이 유일할 겁니다.



이 작품은 유머가 넘치고 휴머니즘 가득한 엔딩이 기다리는 ‘유순한’ 소설이지만, 작품 속의 범죄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작품의 여운이 긴 이유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 작품은 작금의 반려동물 문화의 아이러니를 날카롭게 꼬집은 풍자소설, 사회고발소설의 기능도 갖습니다.


미스터리 자체는 간단합니다. 간단한 수수께끼의 빈틈을 슌페이와 아야 콤비가 주는 소소하면서도 유쾌한 디테일이 채워주고 있죠. 하지만 이야기는 꽤 교묘하게 진행됩니다. 범인의 정체는 소위 클리셰를 배반합니다. 가장 그럴 듯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가장 그럴 듯하지 않은 사람이기도 하니까요. 그래도 나름의 추측은 가능합니다. 그 동기를 추리해 내는 게 쉽지는 않지만요.


엔딩은... 나름 충격입니다. 읽으면서 두 주인공이 등장하는 다른 작품들에 대해 기대를 했었는데, 아예 시리즈에 대한 생각은 없었던 듯, 작가는 아야를 퇴장시킴으로서 팀을 와해시킵니다. 시리즈 물에 대한 제 기대는 무너졌지만, 결말이 주는 애틋함과 충격, 애잔한 슬픔과 휴머니즘은 그 보상이 되고도 남습니다. 인간이 지구 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인 이유는 바로 사랑을 하고 그 감정을 상대와 나눌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야의 퇴장은 아쉽고 슬프지만 허세남 슌페이의 삶에 남긴 흔적만큼은 독자로서 그 여운을 깊고 길게 받아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족


언젠가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낯 모르는 사람의 아이와 자신이 키우는 개가 물에 빠졌고, 둘 다 수영을 못 하고, 혼자 있는 자신이 둘 중의 하나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자신은 개를 구하겠다고요.

글쎄요. 그런 상황에 정답은 없겠지만, 왜인지 서늘하고 오싹했던 기분은 아직도 생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