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살 ‘제니 크레이머’는 친구의 파티에 갔다가 인근 숲에서 성폭행을 당합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폭행의 후유증은 상당합니다. 제니의 부모 ‘톰’과 ‘샬럿’은 어린 딸의 끔찍한 기억을 지워주기 위해 정신과 치료에 의지하는데 그들이 선택한 방법이 썩 좋은 게 아니었음을 곧 알게 됩니다.
극도로 끔찍하고 무서운 기억을 아예 지우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지, 아니면 용감하게 진실에,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정정당당히 맞서는 게 좋을지, 작품의 서두에서 작가가 던지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작품 전체를 관통합니다.
이야기는 끔찍한 육체적 폭력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는 그로 인해 짓밟힌 인권과 존엄, 해체된 정신에 대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겉으로 드러나거나 육안으로 쉽게 확인되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잘 다뤄지기 어렵고, 그렇게 당사자를 평생 괴롭히게 됩니다. 그게 폭력의 실제적이고도 가장 무서운 부분이죠.
절대 돌이키고 싶지 않은 경험, 슬프고 고통스런 기억에 대처하는 방식은 사람들마다 다를 것입니다. 성격이나 가치관, 혹은 개인 고유의 성정에 달려 있거나 부정, 외면, 망각 등의 심리적인 방어기제가 자신도 모르게 작동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무엇보다 상처 앞에 당당히 서는 용기를 갖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부정하거나 숨긴다고 있었던 일이 없었던 것으로 되는 게 아니며, 엄연한 현실이 망각 속으로 사라지거나 착각으로 치부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현재에 처한 난관과 상처, 고통을 끌어안고 그것과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는 노력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상처를 극복했다’는 말은 자신이 상처를 받았음을 인정하고 그것이 치유되는, 혹은 치유가 불가능하더라고 최소한 그것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도했다는 말입니다. 그런 데엔 자신에게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어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이미 일어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외면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겠죠. 상처를 외면할수록 극복과 치유는 더욱 멀어져 계속 그것들에 끌려 다녀야 할 테니까요.
‘상처’를 다스리는 방법은 무수합니다. 그 일이 일어난 원인을 분석하고 혹시나 있었을 자신의 과오를 더듬어 찾아내고 바로잡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지만, 제니에게 일어난 일처럼 불가항력적인 범죄에 의해 입게 된 상처는 보다 적극적인 행동이 요구됩니다. 물론 현실에선 성폭행의 피해자들이 그런 용기를 갖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테지만요.
제니도 물론 그렇게 합니다. 범죄 사실은 만천하에 드러나 경찰력이 나서고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해 정신과 상담이 동원되죠. 하지만 제니의 부모가 선택한 방법은 결국 바람직하지 않았던 걸로 증명되고, 더군다나 이 작품의 화자인 정신과 의사는 그리 믿음직한 인물이 못 됩니다. 사악하기보다는 보편적인 부성애를 지닌, 다소 이기적인 사람이니까요.
이 소설은 일반 스릴러물로 소개됐고 그 장르 안에서 소비되기 쉽습니다. 일단 이 작품은 ‘후던잇(Whodunit)’ 장르의 여러 조건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범죄, 용의자들, ‘미스 디렉션(mis-direction)’을 위한 ‘레드 헤링(red herring)’, 기타 등등...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로서 이 작품은 평범합니다. 그 장르 안에서의 작품 치고는 다소 지루한 편이죠. 게다가 엉뚱한 곳에서 등장하는 폭행범의 정체는 이야기의 본질에 그렇게 깊이 연루된 인물은 아니며, ‘페어 플레이(fair play)’를 위한 단서도 공정하지 못한 구석이 있습니다.
이 작품의 묘미는 작가가 인물들을 보여주는 방법에 있습니다. 중요 인물인 제니보다 오히려 그 주변의 인물들이 더 생생하게 묘사되죠. 독자들은 정신과 의사인 화자의 눈과 머리, 경험을 통해 이야기 속의 인물들을 보게 됩니다. 등장인물들 거의 모두가 화자의 관찰과 분석의 대상이 되며 그들의 과거가 현재의 모습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는지 완전히 그의 의견에 의존하게 되죠. 캐릭터에 관한 한, 이 작품은 마치 성격 분석에 관한 텍스트 같습니다.
그런 부분은 이 작품의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작가는 이야기 안에서 인물들을 ‘보여주기’보다 ‘설명하는’ 것에 많은 지면을 할애합니다. 그리고 그런 점이 이야기로의 독자들의 개입을 방해하고 상상력을 차단시키며 때때로 이야기의 진행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화자가 인물들의 정신분석에 빠져 인물들을 설명하기 바쁜 통에 서스펜스는 막다른 골목을 만나고 이야기 진행은 더디며 간혹 예상치 못하는 곳에서 전혀 엉뚱한 인물의 이야기가 진행되기도 합니다. 독자들에 따라 호불호가 나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저와는 달리 그런 부분에서 흥미와 재미를 찾는 독자들도 있을 수 있겠죠.
작가 ‘웬디 워커(Wendy Walker)’는 놀랍게도(그리고 예상 외로) ‘(정신분석이나 심리학이 아닌)법’을 전공하고 그 분야에서 꽤 훌륭한 커리어를 쌓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이 작가의 데뷔작이라고는 하는데, 작가는 이전에 이미 출판 경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작품에 있어서의 데뷔작이라는 의미는 ‘스릴러’ 장르에서의 첫 작품이라는 의미인데, 그런 구분이 과연 필요할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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