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선집의 편집자인 ‘리처드 댈비(Richard Dalby)’는 해외에서 호러 소설 콜렉터, 앤솔러지 편집자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이 책은 그의 수많은 호러 앤솔러지 중의 한 권인데, ‘책세상’이라는 출판사에서 ‘밤의 여신 닉스의 초대’라는 제목 아래, 시리즈로 내놓은 세 권 중의 한 권입니다. 다른 두 책은 <7월의 유령>과 <달팽이와 장갑>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데, 현재는 절판이라 구하기가 힘이 들죠. ‘책세상’은 현재까지 심심찮게 호러 앤솔러지들을 번역해서 내고 있는데, 우리나라 장르문학 시장의 척박한 현실을 감안할 때, 무척 용감하고 의미 있는 행보라고 생각합니다.
해외에서 기리는 리처드 댈비(이 사람은 지난 오월에 작고했어요. R.I.P.)의 업적 중의 하나는 호러 소설을 ‘찾아냈다’는 겁니다. 그건 말 그대로 숨어 있는, 제대로 알려질 기회가 없거나 한 번 지면(紙面)에 발표되고 잊혔던 숨은 보석 같은 호러 소설과 작가들을 발굴해냈다는 것도 있지만, 도저히 호러 소설 같은 글은 쓸 것 같지 않은 작가가 쓴 (의외의) 호러 소설을 찾아내 대중에게 소개했다는 점도 포함합니다.
이 선집에도 동화 작가인 ‘이디스 네즈빗(Edith Nesbit, 추억의 만화영화 <모래 요정 바람돌이>의 원작자)’이나 <순수의 시대(the Age of Innocence)>, <환희의 집(the House of Mirth)> 등의 작가, ‘이디스 워튼(Edith Wharton)’의 호러 단편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디스 워튼이 호러 단편들을 제법 발표했다는 건 많이 알려진 사실이죠. (이디스 워튼의 호러 단편집은 몇 해 전, ‘생각의 나무’에서 <거울(the Looking Glass)>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판된 적 있습니다.)
수록작들의 스타일은 다양합니다. 모든 작품들이 호러 소설을 지향하고 있지만 딱히 그렇게 보이지 않은 작품들도 드물게 있는데, 개인적으로 호러 소설, 딱 그만큼만 보여주는 작품들보다는 그 이상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작품들에 눈이 먼저 갔습니다. 물론 읽으면서 ‘등골이 서늘해지는’ 경험을 하는 것이 호러 소설의 가장 일차적이고 솔직한 목적이겠지만, ‘공포’라는 감정 아래 보다 진중한 메시지를 품고 있다면 금상첨화겠지요. ‘호러 문학’ 장르는 문학사(史)적으로 개인이나 사회 전반에 걸친 여러 악과 모순들, 억눌린 자아, 억압과 차별 등의 폐해를 드러내기 위한 작가들의 문학적 선택이어 왔습니다.
<그림자의 집>은 친절한 유령들이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수두로 죽은 가족들이 혼자 살아남은 딸의 방문객을 반겨주는 이야기인데, ‘디킨스’ 식의 이야기 진행과 유령들의 감상적인 캐릭터가 인상적입니다.
이 선집의 제목이기도 한 <위팅턴의 고양이>는 기묘한 작품입니다. 연극을 보러 간 주인공이 극 중의 고양이 분장을 한 ‘무엇’을 집에 데리고 오면서 벌어지는 일을 소동극처럼 전개하는데, 작가는 그 ‘무엇’에 대한 정체에 대해선 함구하며 그 실마리를 흩트려놓음으로서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그건 단지 고양이 분장을 한 좀도둑이었을까요. 아니면 고양이의 정령(精靈)? 혹시 연극의 소품을 빌어 실체를 숨기고 이 세상에 나타난 악령 그 자체는 아니었을까요.
호텔 객실에 깃든 악령에 관한 단편인 <17호실>은 화자를 앞세워 이야기를 전달하는 구성, 강력한 이미지, 애매한 결말 등의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어 호러 소설의 전형성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결말의 반전은 저자의 유머 감각을 짐작케 합니다.
이 책의 수록작들 중 가장 로맨틱한 작품인 <여인의 사랑>은 주인공의 남편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남편이 사랑하는 바다에 대한 질투의 감정이 태풍이 몰아치는 밤의 생생한 분위기와 함께 기이하고 섬뜩한 결말로 독자들을 이끕니다. 이 작품은 그 갈등 구조가 특이한데, 주인공이 사랑을 위해 대적할 대상이 ‘자연’이라는 점, 그리고 ‘바다’를 남성으로 표현하고 있는 서양의 문화적 관습에 비춰 볼 때 주인공과 바다의 싸움은 ‘이성애’와 ‘동성애’의 대결처럼 여겨진다는 점 등이 그렇습니다. 그런 점에서 결말은 무척 의미심장한데, 독자에 따라 읽어낼 수 있는 서브텍스트가 다양할 수 있겠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었습니다.
<역으로 가는 길>은 그 안의 이중의 호러 장치가 인상적입니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남자의 영혼에 대해 시작한 이야기는 ‘생령(生靈)’의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독자들의 허를 노리는 결말에서 호러 소설 특유의 장르적 쾌감이 가장 컸던 작품이었습니다.
사악한 영혼이 깃든 책에 관한 이야기인 <책>에는 저절로 위치를 바꾸고 날마다 새로운 문장이 추가되는 고서(古書)가 등장합니다. 비밀스러운 책 자체도 무섭지만, 그것에 영향을 받고 휘둘리다가 그 사악한 기운에 영혼까지 장악당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이 작품이 노리는 점입니다. 점점 미쳐가는 가장(家長)의 모습을 그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스티븐 킹(Stephen King)’의 <샤이닝(the Shining,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의 영화로 더 유명한)>이나 ‘귀신 붙은 책’을 소재로 한 많은 호러 영화들(<이블 데드(Evil Dead)> 시리즈 같은)을 생각나게 합니다.
꿈에 관한 짧은 소품인 <회색 인간들>은 저승사자를 꿈에서 보고 타인의 죽음을 예견하는 인물의 이야기입니다. 작품 자체는 크게 주목할 것이 없지만, 동서양 막론하고 존재하는 저승사자라는 캐릭터, 그리고 그들을 묘사하는 방식의 차이들을 볼 수 있어 흥미로웠습니다. 검은 갓에 검은 도포 차림의 우리나라 저승사자들과는 달리, 보다 단출한 차림을 한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먼 훗날에>는 이 선집의 수록 작가들 중,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인지도가 높으리라 짐작되는 이디스 워튼의 작품입니다. 이디스 워튼은 분위기 묘사에서 탁월한 작가로 이름이 높은데 이 단편에서도 그 기량은 여지없이 발휘됩니다. 실종된 남편의 행방을 몰라 불안에 떠는 아내의 그리움과 초조함, 뒤늦게 남편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된 배반감, 후회 등의 감정이 결말과 잘 이어집니다. 특히 그 과정에서의 인물이 겪는 고통과 고딕 소설다운 배경 묘사, 시작과 맞물리는, 애매하면서 납득할 수 있는 결말 등으로 이 선집을 마무리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는 작품입니다.
시리즈의 다른 책들(<7월의 유령>, <달팽이와 장갑>)과 마찬가지로 이 선집 역시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작가들의 작품들로 꾸며졌습니다.
지금이야 출중한 호러 작가들에게 성별을 따지는 건 무의미하지만, 오래 전엔 호러 소설이 (유한계급) 여성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호러 문학을 위시한 소위 ‘장르 문학’들이 ‘대중 문학’, 혹은 ‘주변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천대받고 있다는 사실 역시 그 시절 여성들의 사회적 정체성과 전혀 무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전적 호러 작가들 중에 여성들이 많은 것도, 호러 소설이나 호러 영화에 여주인공들이 많다는 것도요. 오늘날의 문학사가(文學史家)들이 여성과 호러 문학 사이의 상관관계를 밝히고자 애쓰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억압된 자들의 놀이터이면서 아고라(agora)’가 바로 호러 장르란 얘기인데, 우리의 문학 시장에 걸출한 호러 작가가 등장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아쉽습니다. ‘한(恨)’이라는 정서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들이 우리네들인데요. 우리는 그것을 다르게 풀고 있는 걸까요.
'꽃을 읽기_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수_김숨-리뷰 (0) | 2017.12.13 |
---|---|
야행_모리미 도미히코-리뷰 (0) | 2017.08.29 |
술래의 발소리_미치오 슈스케-리뷰 (0) | 2017.08.11 |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_미치오 슈스케-리뷰 (1) | 2017.07.17 |
정말 지독한 오후_리안 모리아티-리뷰 (0) | 2017.0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