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읽기_책

술래의 발소리_미치오 슈스케-리뷰

달콤한 쿠키 2017. 8. 11. 06:43


얼마 전에 읽은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의 여운이 하도 특이해서 다른 작품을 읽어볼까 망설이던 차에 발견한 같은 작가의 단편집입니다. 아무래도 다른 장편은 시간을 많이 빼앗길 것 같고, 이 정도 길이의 단편집이면 실망스러워도 크게 밑질 건 없겠다 싶어 달려들었지요. 이 책은 현재 절판이라 시중에서 구할 수 없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어요.


여섯 개의 단편이 실린 이 작품집은 옥석이 섞여 있습니다. 앞부분에 실린 이야기들은 평범한 편이지만 뒤로 갈수록 의미가 풍부해집니다. 대부분 깜짝 놀랄 반전의 결말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 이상의 것들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마다 개성이 다른데, 미스터리, 호러, 스릴러, 판타지, SF 등 장르의 혼용이 눈에 들어옵니다. ‘미치오 슈스케(道尾秀介)’라는 작가는 다재다능하거나, 아니면 자기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걸 아직 찾고 있는 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마 팔방미인 쪽이겠지만요.




<방울벌레>는 작품집의 포문을 여는 작품치고는 평범합니다. 배반당한 사랑에 대한 복수, 그 범죄의 비밀을 지켜주려는 지순한 사랑이 맞물리며 묘한 감상을 남기지만, 소재의 무게에 비해 이야기는 가벼운 편이고, 그 감상 또한 찰나에 머뭅니다. 오로지 결말에서 드러나는 충격이 작가가 의도한 전부인데 눈치 빠른 독자들이라면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결말이기도 합니다.


뒤를 잇는 <짐승> 역시 반전을 품고 있지만 바로 전의 <방울벌레>을 읽었으니, 이 작품 역시 결말을 상상하기가 어렵지는 않습니다.

이 작품은 소위 액자식의 구성을 하고 있는데, 이야기 안의 미스터리는 그 사악한 정서로 무척 흥미롭습니다. 육체적 욕망에 눈이 멀어 인륜을 무시한, 제목 그대로 ‘짐승’ 같은 인물은 자신은 물론 주변의 모든 이들을 비극적인 최후로 몰아갑니다. 하지만 이 안의 이야기와 주인공의 이야기는 접점이 없습니다. 주인공의 그런 결말, 혹은 반전이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약간 뜬금없는 편이죠.


추악한 범죄가 등장하는 <요이기츠네>는 굉장히 멋을 부린 작품이지만 감상은 다소 불쾌합니다. 애매한 결말 탓이죠. 과거에 엄청난 악행을 저지른 주인공은 벌을 받은 걸까요? 이런 찝찝한 감상은 이 작품이 SF의 형식과 분위기를 빌었다는 것에 기인하는데, 과거의 자신과 조우한다는 설정은 어떤 물리학적 해석이 가능할지는 몰라도 도덕적으로 면죄부를 구걸하는 느낌이 듭니다. 작품 전반에 걸친 남성적 자의식도 눈에 거슬리고요.


<통에 담긴 글자>는 약간 이해가 어려운 작품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작가의 포커스가 흐릿하거나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남의 소설을 훔쳐 작가로 데뷔한 사람이 알고 보니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이었더라는 설정도 약간 과했다고 생각하고요. 이 작품 역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있는데, 다소 불필요해 보입니다. 저는 이 작품을 ‘권태’가 삶에 미치는 나쁜 영향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는데 그나마 별로 자신이 없습니다. 일본식 저택 구조의 잘 알려지지 않은 면모 같은 건 새로웠습니다.


<겨울의 술래>는 이 작품집의 백미입니다. 거꾸로 진행되는 일기 형식도 독특했고, 연인들의 진정한 사랑을 목격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 사랑은 엽기적이고 외설적이며 슬프고 아름다운 반면 잔인하고 포악합니다. 그렇지만 이 작품집에서 가장 완벽한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런 면에서 ‘슈카와 미나토(朱川湊人)’의 의뭉스러운 단편, <내 이름은 프랜시스>라는 작품을 생각나게 합니다.


<악의의 얼굴>은 흑마술과 따돌림 등의 소재를 빌어, ‘악의’가 만들어지고 발현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원래 말수가 적고 말을 걸어도 항상 애매한 맞장구밖에 치지 않던 S를, 1학년 때부터 모두가 별 이유 없이 멀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게 “저 녀석은 우리를 싫어 해.”가 되었다가 어느 틈엔가 “우리는 저 녀석이 싫어.”로 바뀌었다. 그건 정말로 어느 사이인지도 모르는 동안에 생겨난 공통 의견이었다. 누가 말을 꺼냈는지는 모른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악의의 얼굴>, 본문 188쪽)』는 대목은 무지에서 오는 편견이 혐오로 이어지는 과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사건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괴기스럽고 스릴 넘치는 분위기로 진행되다가 따뜻한 결말로 막을 내립니다. 그 흐름이 좋았습니다.




개인적인 감상이고 작가나 작가의 팬들에겐 미안하지만, 몇 개의 작품을 읽으며 작가는 ‘충격적인 결말’, 혹은 ‘반전’에 너무 힘을 싣지 않았나 싶은 생각을 했습니다. 미국의 TV시리즈 <환상특급(the Twilight Zone)>이나 일본의<기묘한 이야기(世にも奇妙な物語)>의 한 에피소드 같은 느낌이 들죠. 그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현 세계의 반영이나 비판, 풍자 없이 그것에 그쳤다는 건 약간 아쉬운 점입니다.


작품들마다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니셜 ‘S’로 표현되는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 까마귀와 곤충이 언급된다는 점 등이 그렇습니다. S라는 인물은 작품마다 다른 성별과 성격, 역할을 부여받지만 까마귀나 곤충들은 그냥 배경의 소품 정도로 활용됩니다. 작품마다의 어떤 분위기를 제공하고 작품집 전체로서의 통일감을 주려는 의도는 알겠는데, 그것이 성공적이었는지는 의문입니다. 어떤 의미를 부여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작가의 습작 같은 느낌이 듭니다. 곁에 두고 거듭 읽을 이유는 없어 보이지만, <겨울의 술래>와 <악의의 얼굴> 같은 작품들이 남긴 잔영은 당분간 오래 갈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