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덴 철로(도쿄 시에서 운행하는 철도; 역주, 본문 7쪽)’가 가로지르는 일본의 어느 외곽 동네의 주택가. 그 중앙에 ‘아카시아 아케이드’라고 불리는 상점가가 있습니다.
아케이드의 테마송처럼 <아카시가 비가 그칠 때>라는 노래를 주구장창 틀어주는 레코드 가게 ‘유성당’, 주류상점 ‘사와야’, 라면가게 ‘희락정’, 스넥과 가벼운 음주를 할 수 있는 선술집 ‘가즈미소’ 등에 섞여 중고책방 ‘서치코 서점’이 보입니다. 한쪽 소박한 아파트와 낡은 하숙집으로 구성된 주택가 뒤에는 저승과 연결되어 있다는 소문의 절인 ‘가쿠지사’가 있고요.
동네의 분위기는 도쿄이지만 전혀 번화하지 않습니다. 「선로가 수많은 막다른 길과 우회로를 만들어내 혼란스럽지만(본문, 13쪽)」, 「왠지 하루의 흐름이 낙낙하면서도 그만큼 정중하게 살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동네(본문, 271쪽)」입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과 죽음, 사랑이 아카시아 아케이드를 무대로 펼쳐집니다. 상실을 겪는 사람, 용감하게 희생을 선택하는 사람, 설레는 사람, 자포자기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도우려는 사람, 의리를 지키는 사람, 두려워하는 사람, 후회하며 용서를 비는 사람….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엔 공통적으로 ‘유령’, 혹은 ‘귀신’이라는 존재가 등장하지만 무섭기보다 슬프고 안타깝고 아련하고 때론 우습고 유쾌합니다.
일곱 개의 단편들은 19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의 어느 순간을 아우릅니다. 현재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도 있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이 과거를 회상하고 있어서, 작가인 ‘슈카와 미나토(朱川 湊人)’의 특기인 ‘노스탤직 호러(Nostalgic Horror)’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동양적인 정서의, 어쩌면 우리의 옛 TV시리즈 《전설의 고향》을 생각나게 하는 요소들이 무수합니다.
가족애와 책임에 대한 이야기인 <수국이 필 무렵>, 의리와 보은, 용기와 희생의 가치를 강조하는 <여름날의 낙서>. 헌책을 통해 산 자와 죽은 자의 소통과 교감이 설레고 아련한 <사랑의 책갈피>, '수국이 필 무렵‘과는 반대로 가족 구성원에 대한 소유욕, 뒤틀린 가족애가 일으키는 비극, <여자의 마음>, 쓸쓸함과 외로움,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동물과의 교감과 우정을 그린 <빛나는 고양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용기와 그에 따르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따오기의 징조>, 그리고 질투와 편협한 마음에서 비롯된 불행이 진심어린 후회로 구원받는다는 <마른 잎 천사>.
「살아 있는 인간이 알고 있는 것은 터무니없이 넓은 세계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본문, 139쪽).」라는 전제 하에 진행되는 모든 이야기들엔 상점가의 ‘사치코 서점’과 그 주인이 공통적으로 등장합니다. 몇 개의 단편들은 서로 연관이 있고, 인물들을 공유하며 서점 주인에 대한 복선을 포함하고 있어 이 작품집을 두 번 읽을 때 그 재미는 두 배가 됩니다. 작품들의 분량이 대개 짧고 문장들이 간략해서 전체를 읽은 데에 그리 긴 시간이 들지 않습니다. 사치코 서점 주인의 비밀스러운 사연은 맨 마지막 작품에서 소개되죠.
작품들 전체가 ‘호러’를 지향하고는 있지만, ‘간이 쫄아드는 게 싫어서’, 그 장르를 기피하는 독자들도 거리낌이나 망설임 전혀 없이, 매우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작품집입니다. 슈카와 미나토의 다른 작품들처럼 그로테스크한 면도 거의 없고요.
이 작품들을 구상하게 된 작가의 의도와 이 작품집의 성격은 맨 마지막 작품, <마른 잎 천사>에서 서점 주인의 말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매일매일 누군가가 떠나고, 또 매일매일 누군가가 찾아오는군요. 시대도 바뀌고, 유행하는 노래도 바뀌고, 하지만 사람이 느끼는 행복은 예나 지금이나 다 비슷합니다(본문, 273쪽).』
그 말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사족
‘나무 위키’에 의하면 노스탤직 호러의 원조는 슈카와 미나토였습니다. '온다 리쿠(恩田陸)'가 아니라...
아래 링크는 나무 위키의 슈카와 미나토 항목입니다.
https://namu.wiki/w/%EC%8A%88%EC%B9%B4%EC%99%80%20%EB%AF%B8%EB%82%98%ED%86%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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