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atha Christie 다시 읽기

핼로윈 파티_Hallowe'en Party_1969-리뷰

달콤한 쿠키 2018. 4. 9. 07:57


청소년들을 위한 할로윈 파티 현장에서 열두 살의 ‘조이스’가 익사체로 발견됩니다. 놀이를 위해 준비한 물을 채운 양동이에 누군가 아이의 머리를 처박은 거죠. 마침 함께 있던 추리소설가 ‘올리버 부인’은 친구인 명탐정 ‘에르큘 포와로’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포와로는 조이스가 살해되기 전, 과거에 자신이 살인을 목격했음을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떠벌였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그 말이 진실이라면 조이스의 죽음은 그 아이가 봤음직한 살인사건의 범인이 저질렀을 가능성이 크죠. 하지만 조이스는 동네에서 공공연한 거짓말쟁이로 통했고(거의 양치기 수준), 살인을 목격했다는 주장도 믿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열두 살 난 아이가 살해를 당해야 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혹시 조이스가 진실을 말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서두를 지나면 포와로에 의해, 배경이 되는 동네, ‘우들라이 커먼’에서 발생했던 과거의 미심쩍은 죽음들이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부유한 미망인의 갑작스러운 죽음, 사라진 ‘오 페어 걸’, 위조된 유언장 등이 포와로의 레이다에 잡힙니다. 하지만 교살된 여교사나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아 죽은 십대 소녀, 칼에 찔린 변호사 서기 등의 사건도 수상하긴 마찬가지죠.


퍼즐을 여는 의문은 ‘과연 조이스는 사실을 말했는가’입니다. 그 진위 여부에 따라 수사의 방향이 잡히니까요. 그리고 포와로는 ‘조이스의 죽음으로 현재로 소환된 과거들 중에서 조이스가 목격했다던 살인사건은 과연 어느 것인가’에 추리력을 집중합니다. 그걸 보면 포와로의 추리는 조이스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것에 전제를 두고 있음이 분명한 것 같죠. 나중에 밝혀지지만 조이스의 주장은 반만 진실이었습니다.




‘과거의 살인’은 ‘애거서 크리스티’가 즐겨 사용했던 소재 중의 하나입니다. 현재의 범죄를 빌미로 미심쩍은 과거의 범죄들을 불러오는 건 60년대 이후, 크리스티 작품의 주된 메뉴였죠. 이야기에서 보다 중요한 건 현재보다 과거이며 사건의 비밀을 캐는 열쇠는 주로 과거 사실에 있습니다. 포와로가 인용한 ‘과거의 죄는 긴 그림자를 남긴다’는 서양의 속담은 플롯에는 중요한 모티프, 주인공에게는 꽤 쓸모 있는 슬로건이 됩니다.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세 번째 여자(Third Girl)》, 《창백한 말(the Pale Horse)》, 《복수의 여신(Nemesis)》, 《엄지손가락의 아픔(By the Pricking of My Thumbs)》 등도 이런 구조로 전개됩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들은 두 번, 세 번, 거듭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릅니다. 처음 읽을 땐 범인의 정체와 사건의 배후를 알아내는 쾌감이 주가 됐다면, 반복해서 읽을 땐 플롯과 이야기, 즉 드라마의 요소들 같은 디테일이 눈에 먼저 들어옵니다.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약간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 작품엔 독특한 개성이 있습니다. 그리스의 고전극이나 셰익스피어의 연극 한 편을 관람한 기분이 들죠.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들엔 다분히 연극적인 면이 강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특성이 두드러집니다.


이 작품은 상당히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범인의 동기는 다소 모호한 부분이 있어, 현실의 범죄처럼 보이질 않습니다.

범인이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바라는 완벽한 예술품은 이데아(idea)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이상향을 현실에 구현하기 위한 범인의 욕망은, 또 다른 공범의 현실에 천착한 욕망과 묘한 균형을 이룹니다. 이런 부분에서 이 작품의 과장된 연극적인 면이 두드러져 작품 전체에 기이한 여운을 풍깁니다. 연극적이고 신화적이며 극적으로 과장된 이 작품은, 그 말미에 그리스 신화와 셰익스피어에 견준 포와로의 비유로 핑계를 얻습니다. 그리고 포와로와 올리버 여사 콤비의 재치 있는 대사와 행간의 유머 등의 일상적인 요소들이 이런 비현실성과 보기 좋은 조화(실은 ‘극적 대비’이지만)를 이루죠.




이 작품에서 보이는 세계는 작가가 다른 작품들을 통해서 일관되게 보여준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영국의 어느 조용한 마을의 대저택을 배경으로, 50년대 후반에 발표된 작품들에 등장하기 시작한 노동계급이 좀 더 부각되긴 하지만 역시나 중산층 사람들이 주요 인물들로 나섭니다. 거기에 유산문제와 유언장 위조, 치정, 협박, 속임수 같은 사건들을 씨실로, 인간의 얽히고설킨 오욕칠정을 날실 삼아 다양한 인간군상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에서도 작가는 매우 인상적인 인물들을 창조해 냅니다. 주목받고 싶은 욕망에서 나온 조이스의 거짓말은 결국 자신의 불행을 초래하고, (포와로에 의해) ‘맥베스 부인’에 비유된 ‘로웨나 드레이크’의 보스 기질과 탁월한 균형감각은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과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에 의해 바닥을 드러내 보입니다. 이기적인 위조범으로 오해받고 감쪽같이 사라졌던 ‘올가’는 비극적인 희생양이었으며 이야기의 배경이었던 조연 ‘주디스 버틀러’는 비련의 여주인공이었음이 드러나죠.


특히 (역시 포와로에 의해) 그리스 신화의 ‘아가멤논’에 비유된 범죄자는 천재적인 재능을 소유한 미치광이였습니다. 예술가로서의 자질과 욕망이 결국 광기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엔딩에서 밝혀지죠. 범인의 정체가 드러나는 결말엔 어떤 비장함마저 느껴집니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기묘한 이야기입니다. ‘비현실적인 이야기’란 평가는 단점이 되기도 하고 장점이 되기도 합니다. 추리문학은 과장의 장르입니다. 죽음이 과장되고 동기가 과장되며 범인이 밝혀지는 과정(플롯)이 과장됩니다. 특히 이 작품 같은 전통적인 ‘퍼즐 스토리’는 비현실성을 염두에 둡니다. 수수께끼는 많은 경우에 현실(reality)보다는 상상과 환상에 기반을 두죠. 이 작품이 과장되어 있다는 것은 추리문학의 본질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증거로 보입니다.


재미있는 작품이지만 서사 전달적인 면에서 작가는 종종 실수를 저지릅니다.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하고, 중요한 사실을 미리 밝히지 않기도 합니다. 특히 포와로의 나이가 (겨우) ‘50대가 넘었다’는 언급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는 여든이 가까운 노작가의 귀여운(?) 실수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아요.


일각에서는 크리스티가 일흔을 넘어서면서 알츠하이머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낭설이 돌기도 하는데, 위의 실수들을 보면 사실인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편추리소설을 계속, 한 해도 빠짐없이, 임종하기 바로 전 해까지 일 년에 한 권씩 쓰고 출판했다는 건, 정말이지 대단한, 혀를 내두를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이, 제가 애거서 크리스티를 단지 사랑하는 게 아니라 ‘존경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이 작품은 작가의 저작 목록에서 그다지 중요한 작품도 아니고, 작가의 장기가 골고루 발휘됐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추리소설로서 페어플레이에도 그다지 신경을 쓰고 있지 않는 것도 사실이죠.

하지만 이 작품엔 독자들로 하여금 ‘역시 애거서 크리스티!’라고 외치게 할 만한 무언가가 존재합니다. 재미있는 스토리와 치밀한 얼개, 의외의 결말과 더불어 인간성에 대한 통찰, 시대착오적이지만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과 애정, 작가로서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 등이 담겨 있죠. 애거서 크리스티의 팬이라면 꼭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 중의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