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atha Christie 다시 읽기

부머랭 살인사건_the Boomerang Clue_1934-리뷰

달콤한 쿠키 2018. 9. 17. 06:43


‘바비’는 우연히 절벽에서 떨어진 남자를 보게 됩니다. 가망은 없는 것 같고, 일면식도 없지만 목사의 아들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합니다. 남자의 임종을 지켜주는 일이죠. 그런데 갑자기 남자는 눈을 뜨며 이상한 말을 합니다. ‘그들은 왜 에반스를 부르지 않았을까?’

결국 남자는 죽고 바비는 남자의 얼굴을 덮어주기 위해 그가 입고 있던 상의에서 손수건을 꺼내는데 아름다운 여자의 사진을 발견합니다.


이후로 바비의 주변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생깁니다. 사진을 통해 죽은 남자의 신분이 밝혀지고, 심리가 열리고, 거기에 참석한 바비는 사진 속의 여주인공이 아름다움을 잃은 모습에 실망하고, 느닷없이 해외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급기야 독살 당할 위기에 처하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납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바비는 친구 ‘프랭키’와 함께 비밀을 파헤치기로 합니다.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의 1934년 작품입니다. 중간에 단편집이나 《두 번째 봄(Unfinished Portrait)》 같은, ‘메어리 웨스트마콧(Mary Westmacott)’이란 필명으로 발표한 작품들이 있지만, 장편추리소설로서는 같은 해, 《오리엔트 특급 살인(the Murder on the Orient Express)》과 이듬해 《삼 막의 비극(Three Act Tragedy)》 사이에 끼어있는 작품입니다. 말하자면 작가 생애를 통틀어 가장 왕성하고 중요한 작품들이 집중된 시기의 작품인 거죠. 

전통적인 후던잇(Whodunit) 사이에 스릴러 소설이라니, 약간 뜬금없긴 하지만 이 작품은 모험소설을 표방하는 정통 퍼즐 스토리입니다.


이야기의 시작이 매혹적입니다. 미지(未知)의 남자가 죽어가며 남긴 한 마디, 이 작품의 원제이기도 한 ‘그들은 왜 에반스를 부르지 않았을까?(Why Didn't They Ask Evans?)’에 대한 의문은 이야기의 중요한 동력이자 전체를 꿰뚫는 수수께끼입니다.

도대체 ‘에반스’와 ‘그들’은 누구일까요?


미스터리의 근원을 쫓아 현재에서 과거로 역행하는 얼개가 특이합니다. 이야기의 모든 중요한 사실들은 모두 ‘과거’에 있습니다. 살인 같은 범죄가 일어나고 용의자를 물색하고 동기와 방법을 탐색하는 것이 보통 추리소설의 진행이라면, 이 작품은 현재의 사건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사람은 왜 죽임을 당해야 했을까.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고 그 와중에 어떤 적(敵)을 만들었을까. 이는 캐릭터의 분석과 이어져 종종 흥미있는 인간성을 보여주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크리스티 작품이 흥미로운 이유도 단순히 사건(범죄) 중심의 플롯이 아니라 인간, 캐릭터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전작 오리엔트 특급 살인 역시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되어 현재에 발현된 범죄의 배후를 밝히는 이야기였는데, 사실 이런 플롯은 작가의 장기이기도 합니다.


현재의 모든 일은 과거의 영향력 아래에 있습니다. 현재가 과거에 종속되어 있는 거죠. 크리스티는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살인의 방법’보다 ‘살인의 동기’를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즉흥적인 욕망이나 증오, 우발적인 살인은 작가의 작품에서 보기 어려워요. 피해자와 가해자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과거에 교묘히 얽혀 있고 작가가 묘사하는 모든 범죄는 치밀하게 계획된 것들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삶에 우연이나 어떤 기적이 개입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작가의 철학이 드러납니다. 옛말대로 ‘뿌리는 대로 거두는’ 거죠.




‘살인의 방법’이란 얘기가 나와서 적습니다. 추리소설을 짧고 얕게 알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살인의 트릭이 시시하면 작품의 수준을 낮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추리문학이 추구하는 건 ‘게임’입니다. 트릭 역시 게임의 한 요소이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을 구성하는 한 조건일 뿐이죠. 말하자면 선택이지 필수 조건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추리문학의 핵심은 ‘어떻게’가 아니라, ‘왜’입니다. ‘후던잇(Whodunit_Who has done it)’이라는 별명도 ‘누가’에 집중하며, 그 ‘누가’라는 의문은 인간의 행동에 따르는 ‘왜’라는 동기를 내포합니다.

사실 크리스티는 소위 ‘트릭’의 교묘함으로 승부하는 작가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범죄와 해결에만 매달리는 짧은 단편에는 오히려 크리스티는 자신의 허점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작가는 오히려 장편에서 진가를 발휘합니다. 길이가 넉넉한 전개 위에서 인간들을 그릴 여유와 플롯을 비틀 공간을 찾아냈던 거죠. 실이 짧으면 매듭짓기가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크리스티는 플롯 짜기의 명수였던 거죠.

크리스티의 장점은 살인 자체가 아니라 살인을 포함하는 스토리였습니다. 작가의 작품들이 인기있는 이유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개할 줄 아는 능력에서 나옵니다. ‘추리소설다움’이란 그것 역시 문학이므로 스토리텔링에 달려 있다는 좋은 예죠.




주인공인 ‘바비’와 ‘프랭키’ 커플은 종종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인 ‘타미와 터펜스’ 커플과 비교되지만, 귀족의 신분인 프랭키는 ‘침니즈 저택’을 배경으로 한 작가의 두 작품 《침니즈 저택의 비밀(the Secret of Chimneys, 25년作)》과 《세븐 다이얼즈 미스터리(the Seven Dials Mystery, 27년作)》에 나오는 ‘번들’을 연상하게 합니다. 귀족인 신분도 그렇지만 당차고 단호한 성격, 진짜 필요한 곳엔 돈을 아끼지 않는 호탕함, 모험을 즐기고 진실을 추구하는 대담함 같은 면이 두 인물의 공통점이죠. 그리고 크리스티의 스릴러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주인공들이 밝고 악착같지만 ‘가난한’ 것에 비해 프랭키의 ‘경제력’은 《헤이즐무어 살인사건(Murder at Hazelmoor, 31년作)》의 ‘에밀리 트레퍼시스’를 연상하게도 합니다. 이 인물들은 한두 작품에 나오고 마는 단발성 캐릭터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인상적이죠.


유쾌하고 밝고 따뜻한 분위기에 액션이 풍부하고 풀어야 할 수수께끼도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별로 복잡하지 않은 이야기를 복잡해 보이게 구성한 건 작가의 장점이자 능력이겠고요. 호감 가는 범인들의 등장도 크리스티 작품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이는 범죄자가 ‘아주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한 작가의 의도로 보입니다.


‘에반스’가 누구인지에 대한 복선이 없는 것과 주인공들이 운이 너무 좋은 것, 살인자가 주인공들에게 너무 관대한 점, 편지 한 장으로 모든 걸 털어놓는 결말 등이 다소 실망스럽긴 하지만 전체적인 재미에 비한다면 사소합니다. 생동감 넘치는 주인공 커플의 활약과 ‘멜로드라마’, ‘로맨스’, ‘대가족 살인’이라는 크리스티 세계의 중요한 키워드도 놓치지 않고 있으니, 본격물과 모험물 팬들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장점을 지닌 작품입니다. 크리스티의 팬이건 아니건 이 작품은 놓치지 마시길.


사족


크리스티가 붙인 원래 제목은 《왜 에반스를 부르지 않았을까(Why Didn't They Ask Evans)》였지만 미국 시장에선 《부메랑 살인사건(the Boomerang Clue)》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합니다. 「해문」판(版) 제목은 영국판 제목을, 「황금가지」 번역판은 미국 제목을 달고 있으니 잘 모르는 독자들에겐 혼동스럽습니다. 참고하시길.


해문판 제목에 쓴 ‘부머랭’은 표준어가 아니라고 합니다. ‘부메랑’이 맞는 말이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