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atha Christie 다시 읽기

죽은 자의 거울_Dead Man's Mirror_1937-리뷰

달콤한 쿠키 2019. 11. 29. 05:25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의 장기는 주로 장편에서 발휘됩니다. 크리스티는 추리소설의 여왕’, ‘죽음의 공작부인이기 이전에 훌륭한 작가였고 능란한 스토리텔러였습니다. 작가의 소설이 재미있고 또 인기가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살인이나 범죄 이전에 언제나 드라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만드는 세계에선 재미난 인물들, 그들이 엮어내는 엎치락뒤치락하는 관계, 그 모습들을 통해 전달되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작가의 통찰 안에서 범죄 사건은 차라리 소소한 일상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크리스티의 작품들 안에서 범죄나 트릭 같은 추리소설의 요소들은 드라마를 부각시키기 위한 작은 장치나 소품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작가의 최고 걸작 중의 하나인 오리엔트 특급 살인(Murder on the Orient Express)은 아동을 대상으로 한 범죄의 파렴치함을 고발하기 위함이었고 약자들의 연대를 부각한 작품이었습니다. 작가 인생 초기에 수많은 화제를 뿌렸던 걸작 애크로이드 살인사건(the Murder of Roger Ackroyd)은 트릭과 속임수가 난무하는 전형적인 후던잇(whodunti)’이지만 독자들은 결말에서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추악하며 그 끝이 얼마나 쓸쓸한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등장인물이 모두 죽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And Then There Were None)는 어떨까요. 비장미까지 느껴지는 그 작품에서 죽음이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며 작은 과오에도 가차 없는 삶의 무정함에 몸서리가 쳐졌습니다.

 

하지만 작가의 솜씨와 능력을 단편으로 가져오면 약간 달라집니다. 짧은 분량 안에서 작가는 모든 것을 보여주기 위해 몹시 서두릅니다. 짧은 분량 안에서 의외로 서사는 늘어지고 종종 심한 비약으로 결말을 얼렁뚱땅 해치우는 식입니다. 장편에 익숙한 작가의 장기는 단편의 백미인 간결미를 해치며 작가의 최고 장점인 인간미를 발휘할 공간은 확보 받지 못합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건 작가의 탓이겠지만 실력 탓은 아닙니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뛰어난 글쟁이였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그건 아마 작가의 재능이 선택적 조건 아래에서 발휘된 게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을 해 봅니다. 위에서 말했듯 작가는 장편에 능숙한 사람이었고, 단편은 작가가 작품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온전히 담기엔 너무 짧았던 게 아니었을까요.

 

작가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범죄를 동원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추리작가란 타이틀이 붙여졌고 작가의 소설들 안에서 범죄는 필수요소가 되었습니다. 짧은 분량에서 포기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건 인간적인 요소들, 인간관계나 인간의 이중적인 감정, 피상과 이면을 꿰뚫는 혜안 같은 것들이었겠죠. 결과적으로 남는 건 범죄와 해결. 전형적인, 단순한 범죄 이야기였습니다.

 

그렇다고 크리스티의 단편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말은 전혀 아닙니다. 작가의 단골 캐릭터는 언제 어디서 만나도 반갑기만 하고 작품의 길이에 상관없이 그들의 활약을 보는 건 꽤 즐겁습니다. 특히 작가는 플롯의 재활용에 특출한 재능과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인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작품의 플롯에 어떤 요소들을 가감해서 완전히 다른 작품인 것처럼 창조해내죠. 이 작품집에 실린 세 개의 중단편만 보더라도 다른 작품과의 연관성을 유추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작가의 팬이라면 더욱 반갑겠죠.

 

 

<죽은 자의 거울 (Dead Man's Mirror)>은 전형적인, 연극적인 무대의 가족 살인극입니다. 대가족과 손님들이 모인 저택에서 자살 사건이 발생하죠. 사건 현장은 밀실이어서 자살이라고 보는 게 가장 수월하고 속시원한 해결인 듯한데 포와로(Poirot)의 생각은 다릅니다. 포와로는 시체 뒤의 깨어진 거울을 단서로 명쾌한 추리를 선보입니다.

 

이 작품은 중편이라 단편보다 여유가 넉넉한 편이지만 많은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그들 간의 역동적인 드라마를 드러내기엔 부족했던지 작가는 내내 바쁘기만 합니다. 복선도 충분하지 않아 나중에 드러나는 범인의 정체는 다소 뜨악스럽습니다. 하지만 결말에 드러난 동기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어서 이 플롯을 장편으로 발전시켰더라면 또 다른 유명작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작가의 다른 단편, <두 번째 종소리(the Second Gong)>와 비슷한 면이 많은 것을 보면, 그 단편으로 장편을 쓰려다가 실패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

 

<뮤스 가의 살인 (Murder in the Mews)>에서는 결혼을 앞둔 미망인이 자살 시체로 발견됩니다. 하지만 현장엔 자살로 위장한 타살임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고, 무언가 숨기는 것처럼 행동하는 피해자의 동거인과 피해자를 협박한 것으로 짐작되는 퇴직 군인이 용의선상에 오릅니다.

 

작품집 안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이 작품은 태어나 단 한 번도 행복하지 못했던, 그러다 마침내 찾게 된 행복의 기회조차 타인에 의해 좌절되는 친구에 대한 플렌더리스 양의 연민이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어 서글픈 여운을 남깁니다.

 

<로드스의 삼각형 (Triangle at Rhodes)>은 휴양지, 팜므 파탈, 삼각관계, 살인, 포와로라는 키워드 안에서 상상할 수 있는, 작가의 전형적인 작품입니다. 나중에 나온 걸작 장편 백주의 악마(Evil under the Sun)를 연상하게 하는 플롯에 범죄자의 위선과 거짓말, 교묘한 트릭을 꿰뚫어보는 포와로의 날카로운 추리가 명쾌한 결말로 이어집니다.

 

이 작품집에 실린 세 편의 중단편들은 그래도, 작가의 추리 단편들 중에서 품질(?)이 좋은 편입니다. 물론 어려운 수수께끼를 제시하고 명탐정의 명쾌한 해답, 의외의 결말 같은 것에 주안점을 두는 독자들이라면 후회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저처럼, 살인 이외의 다른 것에 더 큰 재미를 느끼고 작가의 그런 점에 후한 점수를 주는 독자들이라면 이 책을 펼치기 전에 다소 각오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역시 크리스티라는 감탄은 당연하겠죠.

 

크리스티의 팬이 아니고, 장편은 좀 기니까 단편을 읽어야지 하는 크리스티 초심자들이라면, 초리소설이 아닌 다른 장르, 호러나 환상의 요소들이 부각된 작가의 다른 단편집이나 특이한 콘셉트의 작품집을 읽기를 권합니다. 수수께끼의 할리 퀸(the Mysterious Mr. Quinn)이나파커 파인 사건집(Parker Pyne Investigates)》《죽음의 사냥개(the Hound of Death), 헤라클레스의 모험(the Labours of Hercules), 화요일 클럽의 살인(the Tuesday Club Murders)같은 단편집이라면 분명 만족하실 것 같네요. 그 책들은 언제 읽어도, 읽고 읽고 또 읽어도 항상 소름이 돋을 정도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