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화가 ‘에이미어스 크레일’이 독살당합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다섯 사람. 그 중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피살자의 아내 ‘캐롤라인’입니다. 평소에 여성 편력이 심하고 사생활이 문란했던 남편과 최근 그리고 있는 초상화의 모델 ‘엘사’와의 관계로 질투와 복수심에 의한 살인으로 여겨지지만, 정작 피고인 캐롤라인은 혐의를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으며 남편의 자살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모든 증거와 증언들은 캐롤라인에게 불리하고, 결국 살인범이 된 캐롤라인은 무기수로 복역하다가 병사하고 맙니다. 그로부터 16년 후, 부부의 딸 ‘칼라’가 성인이 되어 ‘포와로’를 찾아와 결백을 주장하는 어머니의 편지를 보여주며 그것을 증명해 주길 요청합니다.
칼라가 모친의 결백을 믿는 건, 단지 자신의 어머니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워낙 어렸을 때라 거의 기억이 없지만 칼라는 본능적으로 모친이 정직했던 사람이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칼라의 이런 믿음은 인간 성격의 보편성과 일관성을 아우릅니다. 포와로 역시 죽음을 앞둔 사람이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딸에게 편지까지 써가며 거짓말을 할 이유를 전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습관적인 거짓말쟁이라면 모르겠지만요. 포와로는 의뢰인의 믿음이 옳다는 것을 전제로 과거 사건에 연루되었던, 목격자이면서 용의자이기도 한 다섯 명의 사람들을 만나보기로 합니다.
과거의 범죄를 현재로 끌어와 이야기를 전개하는 구성은 크리스티의 팬이라면 매우 익숙합니다. 크리스티의 ‘특허’라고는 표현하지 못해도 작가의 장기 정도는 됩니다. 작가가 이런 플롯에 매우 익숙했던 것뿐만 아니라 특별히 많은 애정(혹은 애착)을 갖고 있었던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과거의 범죄를 다루는 만큼 현재에 진행되는 이야기보다 과거의 기억과 인물들의 진술이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이야기 안에서 포와로는 자신이 들은 진술만으로 훌륭하게 범인을 추리해 냅니다. 전형적인 ‘안락의자형 탐정(arm-chair detective)’의 진수입니다.
액션(행동)보다 대화가 주를 이루는 진행이라니, 다소 지루하게 들리겠지만, 작가는 다섯 사람의 관점을 차례로 제시하는 구성 안에서 관계의 역학, 숨겨진 의도와 뜻밖의 행동,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사실들의 진정한 의미 등을 서서히 드러내며 이야기를 흥미롭게 진행합니다. 인물들의 기억과 진술은 다양한 복선과 단서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그 안에서 정보들을 습득하고 그 의미들을 유추하려는 독자들은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과거의 범죄, 각 장마다 바뀌는 시점 등의 구성을 다루는 작가의 솜씨는 2년 후에 발표된 《잊을 수 없는 죽음(Remembered Death)》에서 더욱 능수능란해집니다.
‘살인 방법’보다 살인의 배경, 즉 인물들 간의 드라마에 집중하는 것이 작가의 40년대 이후의 작풍이라면, 43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과도기적인 성격이 농후합니다. 사실 알고 보면 이 작품엔 소위 ‘트릭’이란 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작가는 ‘사실’들을 나열하며 그 행간에 ‘진실’을 숨겨놓았을 뿐이죠. 독자들을 적극적으로 속이기보다 판단을 어렵게 만드는 겁니다. 들리는 말들과 보이는 행동은 단순하고 자연스럽지만, 그 이면에 다른 말들과 행동들을 생략함으로서 진짜 의미는 교묘하게 감춰지는 거죠.
작가는 ‘속임수’라는 요소를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추리문학의 다른 대가들과는 차별되는 방식으로 독자들을 속입니다. 크리스티의 소설들이 하나같이 재미있고, 또한 추리소설로서 ‘범죄의 여왕’이란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런 구성 능력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인물들의 관계들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의붓동생인 ‘앤젤라’에 대한 캐롤라인의 애정과 관심은 작가가 ‘메어리 웨스트마콧(Mary Westmacott)’이란 필명으로 56년 발표한 《사랑을 배운다(the Burden)》의 ‘로라’와 ‘셜리’ 자매를 연상하게 합니다. 또한 ‘필립’이 ‘에이미어스’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단순한 우정, 이상이 아닐까 상상하는 독자들도 아마 있을 겁니다. 캐롤라인에 대한 거의 증오에 가까운 감정도 뭔가 수상쩍고요. 그래서 TV 시리즈 《포와로(Poirot)》의 한 에피소드에서 이 작품을 다뤘을 때, 필립이 에이미어스를 사랑하게 만든 게 단순한 우연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크리스티가 의도했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영국판 원제인 《다섯 마리 새끼 돼지(Five Little Pigs)》의 출처는 구전 동요 “This Little Piggy”입니다. 작품 안에서 포와로는 다섯 명의 용의자들을 다섯 마리 새끼 돼지로 비유합니다.
아래는 동요의 원문입니다. 구전이라 다양한 버전이 존재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가사라고 합니다.
This little piggy went to market,
This little piggy stayed home,
This little piggy had roast beef,
This little piggy had none,
And this little piggy cried "wee wee wee" all the way home.
많은 독자들이 좋아하고 꾸준히 읽히는, 작가의 걸작 중 하나입니다. 지극히 연극적인 무대, 다양한 성격의 인물들과 흥미로운 그들의 관계, 과거의 살인, 빈틈없는 복선과 단서, 독자들의 허를 찌르는 결말 등 크리스티의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되었습니다.
단지 아쉬운 게 있다면 작가의 진짜 장기인 ‘로맨스’가 빠졌다는 사실. 하지만 작품을 끝까지 읽어보면 독자들을 실망시키지는 않습니다. 방향이 살짝 어긋나긴 했어도 로맨스가 등장하긴 하니까요. 그것도 외롭고 처절한, 피를 철철 흘리며 결국은 무시무시해지는, 너무나 난폭한 나머지 타인에게도 상처를 입히는 그런 사랑이요.
그래서 이 작품은 생각보다 분위기가 어둡습니다.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이라 더욱 그렇죠. 슬픔과 비참함이 묘하게 뒤섞인 여운도 꽤 강렬합니다.
그런 범인에게 동정과 연민의 여지가 있을까요. 그럴지도. 여성 독자라면 어떤 의미인지 알 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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