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불행했던 어머니를 못 잊고 그 불행의 원인이었던 아버지와 인연을 끊고 살았던 ‘데이비드’와 현명한 아내 ‘힐다’, 국회의원으로 출세는 했지만 돈을 밝히는 ‘조지’와 사치가 심한 아내 ‘맥덜린’, 해외를 떠돌던 탕아 ‘해리’, 스페인에서 온 손녀 ‘필라’와 사이먼의 오랜 동업자의 아들인 ‘스티브’가 ‘고스트 홀’ 저택으로 모여듭니다. 그리고 유순하고 순종적인 성격에 아버지 곁을 묵묵히 지켜온 장남 ‘앨프리드’와 지적인 아내 ‘리디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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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한데 모인 건 단순히 오래 떨어져 지냈던 가족들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의 부친, 사이먼은 나이가 들고 병약해졌지만 예전의 잔인하고 짓궂은 성격은 여전합니다. 사이먼은 사이가 나쁜 자식들을 한데 불러놓고 싸움을 부추기고 서로 반목하게 만들어 그 난장판과 긴장감을 즐기고 싶어 합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드디어 사건이 터집니다. 사이먼이 피투성이 시체로 발견됩니다. 현장은 거의 밀실이고 엄청난 몸싸움의 여파인지 모든 게 난장판입니다. 게다가 많은 피! 방안의 금괴에 보관되어 있던 다이아몬드가 사라지고 유언장의 문제가 추가됩니다.
피살자의 자식들과 며느리들이 용의선상에 오릅니다. 동기와 기회가 있었던 가족들은 모두들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서그덴’ 총경은 수사에 나서고 우리의 명탐정 ‘에르큘 포와로’가 은근슬쩍 수사에 끼어듭니다.
대저택이란 무대, 이기적이고 포악한 가장(피해자)과 많은 식솔들(용의자), 포와로의 명쾌한 추리와 의의의 범인.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의 전형적인, 작가가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재료들을 가지고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한, 특기와 재능이 총망라된 작품입니다.
이런 스타일이 지겨울 수도 있지만, 크리스티의 골수 팬들은 상당히 즐거워할 작품입니다. 대부분의 크리스티 마니아들은 바로 ‘그런 식상함’, 작가의 그런 ‘전형성’에 열광합니다.
작가는 이런 스타일의 작품들을 꽤 많이 썼습니다. 그리고 그 작품들은 대부분 작가의 대표작들입니다. 데뷔작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the Mysterious Affair at Styles)》, 《죽음과의 약속(Appointment with Death)》, 《장례식을 마치고(After the Funeral)》, 《비틀린 집(Crooked House)》, 《누명(Ordeal by Innocence)》, 기타 등등. 일부러 팬들을 의식한 건 아닐 것이고, 작가는 자신이 가장 잘 할 줄 아는 게 어떤 건지 분명하게 알았겠지요.
이 작품들의 플롯을 분석하면 작가의 스타일을 알 수 있을뿐더러 추리소설 습작에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작가가 플롯을 짜는 방식이 보이니까요. 물론 그것을 안다고 누구나 이런 작품을 쓸 수 있는 건 아니지만요.
초반엔 인물들이 소개되고 그들 간의 드라마가 전개됩니다. 이 부분은 미스터리라는 장르를 넘어선 보통의 읽을 거리로서의 재미를 선사합니다. 오밀조밀하게 엮인 인물 관계 속에서 독자들은 아기자기한 재미와 미스터리 특유의 긴장감을 즐길 수 있습니다. 작가로서는 복선을 뿌리기 좋은 부분이기도 합니다.
범죄가 터지고 경찰이 등장합니다. 그들이 증거를 수집하고 사람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탐정이 슬그머니 끼어듭니다. 독자들은 용의자 리스트를 만들 수 있고 주인공을 눈으로 좇으며 ‘객관적인’ 단서와 힌트를 모으는 데 집중합니다.
수사가 심화됩니다. 이 부분에선 경찰들은 배경으로 존재하고 주인공인 탐정이 부각됩니다. 이 부분에서도 작가는 단서와 힌트를 제시하는데, 보다 ‘주관적’입니다. 훌륭한 작품일수록 주인공의 눈에만 의미가 보이도록 설계되어 있어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것들을 쉽게 놓거나 알아도 뭔 말인지 오리무중입니다. 독자들은 혼란에 빠지고 각자 진행하던 독자적인 추리에 차질이 생깁니다. 더욱 미궁에 빠지는 거죠.
이 부분에서 독자들은 가학적인 즐거움을 가장 크게 느끼는데, 이는 추리소설, 특히 이런 종류의 ‘후던잇(whodunit)’의 가장 크고 중요한 묘미입니다.
그리고 속 시원한 결말. 무슨 헛소리야, 했던 힌트들이 의미를 부여받고 퍼즐의 조각들은 제자리를 찾습니다. 보통의 추리소설은 범인이 밝혀지는 순간의 카타르시스에만 집중하기 쉽지만 잘 쓴 추리소설일수록 범죄를 통한 인간성에 대한 통찰과 삶에 대한 작가의 목소리가 두드러집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대부분의 작품들엔 이런 여운과 감동을 남기는 결말이 있습니다.
큰 그림은 거의 이런 식인데 크리스티의 진짜 (부러운) 재능은 비슷한 이야기들을 계속 하면서도 그것들을 전혀 같아 보이지 않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플롯 짜기에 능숙하면서 각 작품마다 개성을 부여할 줄 알았던 거죠.
피해자인 사이먼은 소위 ‘발암’ 캐릭터입니다. 포와로는 범인을 잡기 위해 피해자의 ‘성격’에 포커스를 맞춥니다. 죽은 사람의 성격이 드러나면서 자식들과의 감정이 다각적으로 파헤쳐집니다. 독자로서 제가 이 작품에서 가장 즐겼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최고의 흥미와 재미를 보장하죠. 인간의 성격과 보편적인 심리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작가가 보여주는(혹은 들려주는) 인간 심리에 대한 견해는 종종 편협하고 편견에 가까울 때가 있습니다. 이는 ‘심리학’이라는 과학에 근거하기보다 관찰과 경험, 그리고 숙고를 통한 ‘의견’에 가깝기 때문인데, 그래서, 전문적이지는 않지만 보편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인간적이고 친숙하며 그럴 듯하게 들립니다.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데이비드와 죽은 어머니와의 관계입니다. 데이비드는 아버지에게 홀대받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동정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외되어 외로웠던 어머니는 그 속내를 어린 데이비드에게 모두 풀었고 그것이 데이비드로 하여금 질리게 만들었을 테니까요. 데이비드는 아버지는 물론이고 어머니도 부담스러웠을 겁니다. 아버지에게는 분명한 증오를 품지만, 어머니에 대한 감정은 복합적입니다. 사건이 해결된 후, 어머니의 유품을 가져가겠냐는 맏형의 제안에 데이비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집 것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차라리 과거와 함께 모두 없애버렸으면 좋겠어.」
가학적인 가장의 죽음은 자식들에게 어떤 면에선 비극이 아닌 일종의 호재로 작용합니다. 데이비드의 말대로 죽은 건 ‘증오하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속의 ‘증오’ 자체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에겐 몹시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용서’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용서를 할 수만 있다면, 평소 증오와 분노로 향해 있던 의식은 우리 자신과 주위를 향합니다. 이 작품의 결말처럼 비로소 평화와 안정이 그 빈자리를 채웁니다.
이 작품엔 ‘피’가 유난히 강조됩니다. 피의 이미지는 작품 전체를 압도하는데, 이는 작가가 작품 안에서 그려내는 살인이 너무나 인공적이라는, 현실적이지 않다는 시동생의 불평에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이라 합니다. 하지만 그 도전이 성공적이었는지는 의문입니다. 이 작품의 살인 역시 지나치게 교묘하고 비현실적으로 보이니까요. 하지만 추리소설 속의 살인이 ‘오락으로서의 살인’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사이먼 리의 죽음은 거의 완벽한 퍼즐에 가깝습니다.
또한 ‘피’는 표면적으로 죽음, 살인, 출혈의 상징이지만, ‘혈통’이란 단어를 독자의 무의식에 은근히 그리고 꾸준히 각인시킵니다. 이는 작품의 모티프이자 가장 중요하고 직접적인 단서가 됩니다.
이 작품의 살인 방법, 범인이 수사를 혼란에 빠뜨리도록 고안된 방법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본다면 말이 안 됩니다. 하지만 그 시대를 염두에 둔다면 꽤 괜찮은 트릭이죠.
그러고 보니 요즘의 과학적인 수사가 언제부터 가능했는지 궁금합니다. 지문이나 혈흔 분석 같은 건 일찌감치 했던 것으로 아는데, 이 작품이 쓰인 1938년엔 아직 ‘그런 일’이 불가능했던 걸까요. ‘그런 일’이 어떤 건지 밝힘으로서 스포일러가 되고 싶진 않습니다. 궁금하다면 직접 확인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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