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기 타이피스트인 ‘셰일라 웨브’는 고객의 요청으로 그 집을 방문한다. 하지만 빈 집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중년 남자의 시체와 4시 10분을 가리키고 있는 네 개의 시계. 알고 보니 그 집의 주인인 ‘페브마쉬 양’은 타이피스트를 부른 적이 없고 현장의 시계도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주장한다. 죽은 남자는 신원불명이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시계들 중 하나가 현장에서 사라지고 얼마 후, 두 번째 살인이 터진다.
도입 부분이 매력적이다. 첫 장을 열자마자 독자들은 ‘어마무시’한 사건에 직면하는데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한둘이 아니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다. 게다가 그 연극적인 무대라니. 지나치게 과장된 면이 없지 않으나, ‘후던잇(Whodunit)’ 장르의 성격을 고려하면 큰 흠은 아니다.
미스터리 장르의 미덕은 독자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다. 추리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가학적인 고통, 혹은 즐거움을 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의 도입부는 모범적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면 크고 작은 문제가 서서히 드러난다. 플롯은 재활용이고 ‘안락의자 탐정(armchair detective)’을 자처하는 ‘포와로’의 추리는 기계적이다. 작가의 특기였던 ‘로맨틱 미스터리’조차 수줍음이 사라져 억지스럽고 민망하다. 스파이 스릴러 장르와 전통적인 후던잇 장르를 섞어놓은 작가의 시도는 서로 삐걱거려 다소 황당한 결말로 이끈다.
사실 자신의 기존 작품에서 플롯을 재활용해 환골탈태한 작품으로 (새 작품인 척) 내놓는 건 작가의 장기이고 결과 또한 대부분 훌륭하니 (크리스티의 작품에 익숙하다면) 독창성 운운하며 트집 잡는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스파이 스릴러와 후던잇의 혼용 또한 작가가 꽤 자주 사용한 방법인데, 이 경우에 있어서 결과는 ‘케바케’다. 어떤 작품은 괜찮고 어떤 작품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후자인데 두 장르가 따로 논다. 지극히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범죄는 영국 내의 ‘공산주의자’를 고발하려는 의도와 잘 붙지 않는다. 목적과 성격이 전혀 다른 두 플롯이 한 작품 안에서 각자 고유한 지면을 차지하면서 적절히 뒤섞이려면 공통분모(여기서는 동기와 기회 면에서)가 있어 서로 돕거나 반목해야 한다. 그래야 서로 상관이 있는 모양새가 나와 작가의 의도가 효과를 발휘한다. 그런데 지금은 살인범도 그렇고 포와로도 그렇고 지나치게 운(어쩌면 우연)에 의존하고 있다. 어쩌다 얻어걸린다고나 할까.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가 거의 말년에 완성한 작품이다(63년 作. 이로부터 10년 후(1973년), 작가가 마지막으로 쓴 소설, ≪운명의 문https://soulflower71.tistory.com/407≫이 출판된다). 작가가 60년대에 발표한 작품들을 보면 사건의 ‘불가사의함’이 특히 두드러지는데, 이 작품은 그런 특징에서 다소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인간의 양면성, 사건보다는 캐릭터에 포커스를 두어 작가가 여전히 ‘인간’이라는 주제에 천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소’의 대립이 한창이었던 60년대의 작품이니, 스파이, 간첩 운운하는 이런 이야기가 가능했을 것이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의 세대가 이 작품을 읽는다면 주석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 작품에도 당시의 소련에 망명하려는 인물이 나오는데, 적지 않은 작품에서 공산주의를 적대시했던 걸로 미루어 작가가 보수적이었다고 짐작해도 될까(여러 평론가들이 크리스티를 매우 보수적인 사람으로 여긴다). 하지만 당시엔 이쪽 세계에서라면 당연한 일이지 않았나. 오늘날 스파이 스릴러를 쓰려는 작가들은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할까. 어떤 인물이 등장하고 어떤 갈등을 엮으며 어떤 싸움을 할까. 과거의 스파이 스릴러가 ‘소련 팔기’가 주종목이었다면, 오늘날의 스파이 스릴러는 새로운 세대의 독자들을 위해, 문학으로서 어떤 덕목을 갖춰야 할까. 한 장르 안에서도 문학이 시대에 맞춰 다양한 모습으로 변태되는 걸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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