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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플라이언스_Compliance_2012-리뷰

달콤한 쿠키 2018. 7. 27. 07:40


무대는 미국의 어떤 패스트푸드 레스토랑. 어느날 아침, 매니저인 ‘샌드라’는 자신을 ‘대니얼스 경관’이라고 밝히는 한 남자로부터 전화를 받습니다. 스스로를 경찰이라 주장하는, 전화선 너머의 남자는 그곳의 종업원인 ‘베키’가 손님의 돈을 훔쳤으며 자신을 대신해 용의자인 베키를 격리하고 감시하며 몸수색을 해달라고 샌드라에게 요청합니다. 그리고 샌드라는 그 지시를 ‘충실히’ 따릅니다.


결론부터 적자면, 샌드라에게 전화를 건 사람의 이름은 대니얼스가 아니었고 경찰도 아니었으며 이 사람이 하는 말은 모두 거짓이었습니다. 그냥 장난전화였던 거죠. 그리고 이 사악한 장난전화는 ‘성폭행’으로 치닫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지만, 똑같은 양상의 칠십여 건의 사건이 미국 전역의 서른 개가 넘는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에서 벌어졌습니다. 오래 전의 일도 아닙니다. 겨우 십사 년 전의 일이에요.


세상에. 어떻게 그런 속임수에 넘어갈 수 있을까요. 죄다 멍청이들이거나 최면에 걸렸던 걸까요. 이 영화, 혹은 그 사건을 접한 거의 대다수가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진짜로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영화가 실제 사건을 그대로 옮겨왔다고 가정할 때, 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피해자인 베키를 포함해) 총 여섯 사람입니다. 한 사건에 여섯 명이니 미국 전역에서 일어난 칠십 여 건의 사건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어림잡아 사백이십 명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모두 멍청이나 무뇌아이거나 머리에 우동 사리가 든 사람으로 봐도 무방한 걸까요?


그렇게 판단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만 해도 모두 어른들이고, 고등 교육을 받은, 평균, 혹은 그 이상의 지능을 지닌,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로 보입니다. 하지만 정도를 넘어선 누군가의 지시에 반항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해롤드’ 한 사람 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처구니없는 지시에 복종하거나 가졌을 법한 의심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모두들 이성이 마비되었던 걸까요? 세뇌라도 당한 걸까요?




피해자들에겐 안 된 얘기지만, 이 이야기는 ‘밀그램 실험(Milgram Experiment)’을 설명하기 딱 좋은 사건입니다. 모종의 ‘권위’에 인간들이 얼마나 쉽게 복종을 하는지에 대한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의 실험에서 중요한 조건은 ‘상황’과 ‘권위’입니다.

영화 속에서(실제의 사건에서) 전화를 건 남자는 실제 경찰이 아니었지만 피해자들은 그를 경찰로 믿습니다. 거짓으로 꾸며낸 ‘도난 사고’가 그럴듯한 ‘상황’을 만들고 경찰이라는 위장된 ‘권위’는 사람들의 판단력과 도덕성을 무마시킵니다.


밀그램 실험의 연장선인 ‘스탠포드 감옥 실험(SPE; Stanford Prison Experiment)’을 주도한 ‘필립 짐바르도(Philip Zimbardo)’역시, 자신의 저서 《루시퍼 이펙트 (the Lucifer Effect)》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며 이런 일이(이런 과한 복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하나 더 추가합니다.

레스토랑이라는 사업의 특성 상, 그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고객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에 따르도록, 즉 ‘복종’하도록 훈련받은 사람들이라는 겁니다(‘필립 짐바르도’ 著, 《루시퍼 이펙트 (웅진지식하우스 刊)》 431~433쪽). 그 사람들은 ‘아니요’라는 대답을 할 수 없게끔 교육받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동조성’과 ‘강한 영향력에 대한 복종 심리’가 가세한다면, 우리 사회의 ‘갑질’이 서비스 산업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할 때, 훨씬 더 쉬워진다는 매우 강력한 증거가 될 수도 있죠.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힌 영화입니다. 도발적인 사건에 ‘인간 본성의 맹점’이란 흥미로운 주제를 담고 있지만, 영화는 마냥 메시아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캐릭터가 살아 있는 인물들과 그들의 분명한 역할은 잘 짜인 드라마의 좋은 재료들입니다. 베키에게 가해지는 고난의 수위를 점점 높여가며 관객들의 감정(짜증과 분노 같은)을 고조시키는 극적 구성도 좋죠. 특히 샌드라와 베키의 대립을 암시하며 묘하게 각을 세우는 초반의 드라마는 전체로서의 영화가 보여주고 전달하려는 감정에 좋은 밑밥이 됩니다. 피상적으로 이 영화는 샌드라와 베키의 대결처럼 보이니까요.

이런 진행을 뒤집고 샌드라 역시 피해자로 만드는 결말의 아이러닉함도 인상적입니다. 정도는 다르지만 샌드라 역시 피해자라는 사실은 분명하니까요. 그들이 근무하는 회사가 직원들에게 사건에 대한 경고를 게을리 했다는 점에서는 특히 그렇죠.

하지만 영화의 노림수는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 장난 전화가 얼마나 나쁜지에 있지 않습니다. 영화가 궁극적으로 고발하려고 했던 것은 인간 심리, 혹은 본성의 맹점입니다.


스탠리 밀그램이 자신의 이름을 붙인 실험에서 보여준 권위에 대한 인간의 복종 심리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를 거치며 인간의 ‘악(惡)’을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홀로코스트(the Holocaust)’ 같은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지,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끔찍한 대량학살에 기꺼이 동조할 수 있었는지,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말로 ‘그것’을 설명합니다. 무시무시한 범죄적 행동은 반사회적이고 피에 굶주린 미치광이들에 의한 게 아닌, ‘특정한 상황과 조건’ 아래에 놓인 우리 주변의 보통의 이웃이나 바로 우리 자신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된다는 거죠.


우리 주변에도 그 예가 있습니다. 뉴스 보도나 신문 지상에서 흔히 보는 ‘보이스 피싱’ 범죄 역시 맥락을 같이 합니다. 금융기관, 경찰, 심지어 국정원의 신분으로 위장한 보이스 피싱 범죄자들은 꾸며낸 ‘권위’와 거짓된 위급 ‘상황’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심지어 현직 판사조차)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어 범죄의 피해자로 전락시킵니다.

‘녹조 라떼’라는 별명을 얻은 ‘사대강 사업’은 어떤가요. 학식 넘치고 저명한 인사들이 그것에 찬성하고 동조하며 찬사를 바친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정치적 억압이 있었거나 사회적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잠깐 생각하고 연구해도 알 수 있는 비리(非理)에 자발적으로, 기꺼이 반색을 드러낸 사람들에게 ‘동조’와 ‘복종’의 태도를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사족


‘compliance’라는 단어를 영어 사전에서 뒤져보면, ‘따르기, 준수, 추종, 순종, 비굴, 협력, 복종’ 등의 뜻이 나옵니다. 그리고 물리학 용어로서 ‘휨과 비틀림, 응력의 비(比)로 표시하는 물질 상수. 물질이 변형하기 쉬운 정도를 나타내는 양(다음사전 인용)’을 의미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