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읽기_책

여름, 스피드_김봉곤-리뷰

달콤한 쿠키 2018. 9. 17. 06:14


작가 ‘김봉곤’의 첫 소설집입니다. 수록작 거의가 ‘퀴어 작품’이며 작가는 게이입니다. 이렇게 솔직히 적는 건 ‘아우팅’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작가는 이미 커밍아웃을 했으니까요.


작가, 김봉곤은 큰일을 해냈습니다. 제가 아는 한에서 ‘퀴어 문학’이라는 장르를 오버그라운드로 끌어낸 최초의 작가니까요. (혹시 잘못 알고 있다면 바로잡아주시길) 이른바 퀴어 문학의 커밍아웃인 셈이죠.


물론 이전에도 쓰고 출판된 성소수자 작가들과 그 작품들이 있는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요즘의 대형 서점 한 쪽에는 ‘B.L물(物)’, 혹은 ‘G.L.물’ 이라고 적힌 서가가 있기도 하고요. 지금까지 게이나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같은 성소수자들이 나와 그 삶을 이야기하는 작품들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거의 이성애자 작가들에 의한 것이었거나, 자신의 진짜 정체를 감추기 위해 필명으로 발표하는 하이틴 로맨스 부류의 작품들이 대다수였죠.


하지만 김봉곤은 국내의 중요 일간지의 신춘문예에서 수상했고, 국내 거대 출판 기업 중의 하나를 통해 이 소설집을 냈습니다. 김봉곤은 ‘자본’과 ‘권력’을 등에 업고 있는 겁니다. 그만하면 ‘게이 작가’로서 대단한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게이 작가로서’라는 표현은 우리의 사회 문화적 분위기에 여전히 팔팔하게 살아 있는 ‘퀴어(queer)’, 즉 ‘성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와 편견을 염두에 둔 것이니 오해 없으시길)


하지만 무척 아쉽게도, 이 작품집의 의미는 그게 전부입니다.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여섯 편의 작품이 실린 이 소설집은 여기가 저기 같고 그게 이거 같습니다. 이런 감상은 각 작품마다의 개성이 살아있어 전체적으로 다이내믹하지만 분위기와 정서, 테마, 작가의 고집 같은 것이 전체를 꿰뚫어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작품집이라면 분명한 장점입니다. 하지만 고만고만한 작품들이 도토리 키 재듯 아웅다웅하고 있는 경우라면 단점이 됩니다. 김봉곤의 이 데뷔작처럼요.


책의 뒷표지에서 한 비평가는 작가를 ‘사랑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호의와 칭찬이 그 의도였겠지만 제게는 마치 조롱처럼 들립니다. 반가운 말은 아닌 셈이죠.

작품집의 거의 모든 작품이 ‘사랑’으로 시작해 ‘사랑’으로 끝납니다. 주인공을 움직이게 하는 건 사랑입니다. 주인공은 사랑에 가슴 졸이고 사랑에 기뻐하고 사랑에 갈등하고 애달아 하다가 사랑에 좌절합니다.


작가가 천착하고 있는 테마가 사랑이고 작가의 세계가 사랑에 의해 움직인다면 사랑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쓰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여러 개의 작품들이 실리는 작품집에서 매 작품마다 그런다면 지루합니다. 식구들이 생선을 좋아한다고 일 년 열두 달 매 끼니마다 생선찌개에 생선구이, 생선전에 생선찜으로 밥상을 차리는 엄마는 아마 없을 겁니다.

하지만 김봉곤은 그런 밥상을 차립니다. 워낙 생선이 귀해서 반갑기는 하지만 먹기엔 지루합니다.


모두가 일인칭 시점의 고만고만한 이야기에 고만고만한 화자들이 등장하는 것도 눈에 거슬립니다. 영화를 하거나 글을 쓰는 이십대 후반 정도의 대학생, 혹은 직장인. 모두 좋은 학벌에 고급스러운 취향, 뚜렷한 주관과 분명한 선호도. 화자들은 돈 없고 정착을 아직 못했다는 핸디캡조차 액세서리처럼 달고 다닙니다. 그들의 그런 태도는 ‘승화(昇華)’와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자기 연민에 빠져 있어요.

화자들이 작가의 모습과 중첩된다는 것도 마음에 별로 들지 않습니다. 책표지 머리에 짧게나마 실린 작가의 약력을 눈여겨본 독자들이라면 혼란이 아니라 거의 믿게 될 겁니다.

주변의 인물들도 엇비슷합니다. 천편일률적인 인물들과 뻔한 소재로 나올 수 있는 이야기가 얼마나 다양해질 수 있을까요. 물론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만 이 작품집에 실린 작품들이 그 한계를 벗어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쯤 되면, 독자로서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쓴 거라는 생각은 무척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진짜 그랬을까요?


저로서는, 작가가 완벽히 자신의 경험을 적었다고는 여겨지지는 않지만 작품들의 많은 부분이 작가 본인의 경험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고 나쁠 것은 없습니다. 상상력의 토대는 경험이라는 건 지극히 당연하니까요. 하지만 어떤 작품이, 그리고 작품집 전체가 작가의 고백, 하소연처럼 들린다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을 쓰는 사람과 그것을 읽는 사람들과의 매개는 작품이어야지 작가의 사생활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만나면 주구장창 자기 얘기를 떠들거나 하소연만 늘어놓는 친구를 만나고 들어오는 날엔 유난히 피곤합니다. 화음도 별로 좋지 않은데다가 변화 없이 반복되는 돌림노래가 지겨운 것과 마찬가지죠.

독자가 원하는 건 만들어진, 그럴 듯한 상상이지 작가의 사생활이 아닙니다. 독자가 듣고 싶어 하는 건 ‘진실’을 품은 거짓말이지 작가의 고백이 아닙니다. 독자가 소설에서 기대하는 건 ‘지어낸 이야기’이지 ‘르포(reportage)’가 아닙니다. 작가는 글을 쓰기 이전에 이야기를 ‘짓는’ 사람입니다.


퀴어 문학으로서 퀴어들의 이야기를 하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퀴어 작가가 퀴어 소설을 쓰면서 퀴어라는 주제에 고집해야 한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그리고 퀴어 문학에서 ‘퀴어’들은 단순히 소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작가는 ‘퀴어에 대한’ 입장과 ‘퀴어로서의’ 입장, 그 중간 어디쯤에 있어야 합니다. 작가에게 퀴어들은 대상입니다.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작가가 그 대상에 밀접하게 있으려 할수록 작가는 ‘그들’이 되고 그들 안에 있으며 그들 자신이 되고 맙니다. 그 안에서 함몰되어 그 밖의 세상을 보지 못합니다. 그들과 그들을 둘러싼 바깥세상 간의 역학 관계, 더 넓은 네트워크를 그리는 데 실패합니다.


작가, 김봉곤은 작품들을 통해 ‘퀴어들’만 보여줄 뿐, 퀴어가 사는 세상을 보여주진 못합니다. 오히려 그래서 퀴어들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퀴어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퀴어들에게 사랑은 일부분일 뿐 전부는 아닙니다. 사랑으로 똘똘 뭉쳐진 사람도 결국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그 안에서 먹고 숨 쉬고 타인들과 엮입니다.

퀴어들이 받아들여지거나 내쳐질 때, 사랑받거나 혐오와 배척의 대상이 될 때 그들은 존재합니다. 그래야 그 존재에 의미가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소재가 지극히 개인적이고 국소적이라는 걸 염두에 둔다고 해도 그것을 시종일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작품은 고루합니다. 가끔은 렌즈에서 눈을 떼고 먼 시선으로 볼 필요도 있습니다.


퀴어 문학이 오늘날 폭넓은 스펙트럼을 지니지 못한 이유는 아마 그들의 ‘폐쇄성’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벽장 안’에 갇혀 있어왔고 소통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대상은 같은 퀴어들 뿐이었습니다. 어쩌다 벽장 밖으로 나간 퀴어들에겐 혐오와 비난, 조롱이 따랐습니다. 퀴어들의 문제의식이 편협하고 국소적이라는 건 아마 그들의 탓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퀴어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작품에서 진짜 중요한 건 ‘그들’ 자신이 아니라 ‘그들이 속한 세계’입니다. 그들을 어디에 데려다놓을 것인지, 그들 주위에 어떤 사람들을 세울 것인지에 대해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합니다. 작가는 작품 안에서 인물을 그리지만, 결과적으로 독자들에게 내미는 건 작가가 인식한 ‘세상’입니다.




앞부분에 실린 네 작품, <컬리지 포크>, <여름, 스피드>, <디스코 멜랑콜리아>, <라스트 러브 송>은 서로 약간 정서만 다를 뿐, 맥락이 비슷한 작품들입니다. 잔뜩 멋을 부리고 있는 문장들을 거세하면 얄팍한 감성, 얕은 이야기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위에 적은 제 감상이 상통하는 게, 마치 연작소설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밝은 방>을 읽을 때, 오히려 숨통마저 트였습니다. 유일하게 ‘사랑’에서 자유로웠으니까요. 젊음의 불안과 미래에 대한 공포를 비슷한 사람들과 서로 위로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어 가장 빛이 납니다. 하지만 내면의 불안을 토해냈을 뿐이라, 종국엔 ‘그래서 뭐?’라고 묻게 됩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독자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작품들이 있는데, 이 작품은 거기에 모자랍니다. 문학작품으로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의문을 제시하거나 질문을 던지지도 않고 작가의 의식이 드러나 있지도 않습니다. 아주 단순히 ‘재미’를 추구하는 건 더욱 아니고요. 이런 작품을 대할 때마다 작가에게 묻고 싶습니다. 왜 이런 작품을 쓰게 됐나요, 라고.


작가의 등단작인 <Auto>는 맨 마지막에 실려 있습니다. 중편이라 제일 깁니다. 그리고 그것과는 다른 이유로 지루합니다. 읽는 내내 무엇을 작가가 어떤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 건지 궁금했습니다.

모든 문학작품에 뚜렷한 목적, 분명한 주제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한다 쳐도 최소한 그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 ‘이유’는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야 독자들이 끼어들 틈이 생기니까요.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에서 작가의 어떤 가능성을 보았던 걸까요.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 그 이상은 아닙니다. 그것도 글을 써야 하는 이유를 구구절절 읊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계기가 되는 것도 ‘실연의 상처’ 때문입니다(OMG).


사실 갓 데뷔하는 작가의 첫 작품집에 이런 성격의 작품들이 종종 끼어있는 걸 더러, 자주 봅니다. 이런 작품이 심사위원들에게 쉽게 어필하고 그래서 등단작이 되는 것도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솔직한 의견으로는 이 작품은 일기장 안에 존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작가가 무슨 얘기를 하던 작가의 자유이지만 독자가 벽을 마주한 기분이라면 그건 문제가 됩니다.


인물, 혹은 작가 자신의 내면에 천착하느냐, 외부와 소통하는 인물, 혹은 자신을 그리느냐는 작가의 완전한 선택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 자신과 세상에 대한 그 무엇, 작가의 통찰이나 개인적인 깨달음을 통해 얻게 되는 ‘진실’과 마주하는 것은 독자의 권리입니다. 그리고 작가는 독자들에게 그것을 제공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문학 작품이란 응당 그래야 하거니와 독자들이 지갑을 여는 이유이기도 하니까요.




‘그들의, 그들에 의한, 그들을 위한 무엇’은 분명 존재합니다. 퀴어에 관한 무엇도 ‘그 무엇’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학이라면 문제가 다릅니다. 문학의 전제는 ‘소통’입니다. 쓰기 이후에 ‘읽기’와 ‘보이기’가 따라야 의미가 있습니다. 라푼젤은 영리하게도 머리를 길게 길렀습니다. 그 필요를 예상했던 거죠.


퀴어 문학은 지금까지 충분히 ‘그들만의 리그’여 왔습니다. 이제 그러지 않아도 되는지, 그 판단은 아직 섣부를지라도 ‘벽장 문’은 반쯤 열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거기서 나와 사람들과 악수도 하고, 서로 안기도 하고 서로 욕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진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진짜 삶을 말하고 보여줘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이성애자가 전부가 아니듯이 퀴어들에게도 사랑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들의 삶에도 ‘세상’이 존재합니다. 자기 안의 사랑은 결국 세상 속의 사랑과 통해야 합니다.


저는 단순히 글을 쓰는 게 아닌, 이야기를 짓는 행위가 음식을 만드는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고 여깁니다.

음식을 만들려면 (혹은 이야기를 지으려면) 재료가 선택됩니다. 글감이죠. 재료를 씻고 다듬고 어떻게 조리해서 어떤 요리를 만들까, 하는 궁리는 작품을 구상하고 구성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조리에 들어갑니다. 이는 집필하는 과정에 비유됩니다. 이윽고 상에 오른 음식을 다른 이들이 먹게 됩니다. 맛은 그 이야기의 감동이나 정서적인 어떤 충격에 상응합니다.


김봉곤의 이 작품집은 여러 면에서(개인적으로도, 문학적으로도,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큰 성취를 이루어 냈으나, 작품들만으로는 아쉬

움이 큽니다. 마치 혼자 먹기 위해 만든 음식 같습니다. ‘싫음 먹지 마’라고 한다면 물론 그럼 되지만, 또 그래야 하지만, 그 음식을 꼭 먹어보고 싶고 그 음식을 기다렸고 그 음식이 궁금한 사람들이라면, 싫음 안 먹어도 그만인 게 아니라 싫어도 꼭 먹어야 하는 사람들이라면 그 성취를 축하하기보다 회초리를 드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집을 읽고 정말 많이, 한참이나 고민한 게, 리뷰를 어떻게 쓸까의 문제보다 이런 리뷰를 과연 써도 될까의 문제였으니까요. 그 고민이 작가에 대한 애정, 그보다 퀴어 문학에 대한 애정, 훨씬 이전에 퀴어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됐다는 건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되겠죠.


변명이 너무 과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의 건투를 빕니다.




사족


1. 호흡이 길고 자기 재미에 빠진 것 같은 문장들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단지 작가의 개성인 걸까요. 아니면 ‘자뻑’ 수준의 말장난일까요.


2. ‘B,L.’이니, ‘G.L.’이니, 이런 명칭보다 저는 ‘퀴어 문학’이라는 용어를 선호합니다. 문학적 정체성도 오히려 더 명료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