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유괴’로 시작됩니다. ‘다이나’는 쇼핑몰 주차장에서 다섯 살 아들 ‘로비’를 유괴당하고 스스로는 반불구의 몸이 됩니다. ‘아이를 유괴당한 부모’라는 소재만으로도 쓸 거리가 넘쳐나지만, 작가는 그보다 ‘유괴를 행한 자’와 ‘유괴를 당한 아이’ 사이에 일어나는 ‘관계의 변화’를 건조하고 냉랭한 문체로 독자들에게 들려줍니다.
유괴범인 ‘체스터 캐시’는 위선적인 인간입니다. 전에도 아이들을 유괴했고 성적으로 학대하다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성적 매력이 떨어지면) 가차 없이 죽입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빈민가의 교회를 돌며 목사 흉내를 내죠. 체스터 캐시의 이런 모습은 인간성의 이중성, 선(善)과 악(惡)이 공존하는 인간성의 본질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로비’는 유괴 범죄의 피해자입니다. 누구보다도 그 피해가 가장 심각합니다. 강제로 부모와 헤어진 것으로도 모자라 성적으로 학대당하고 무임 노동에 내몰리고 그 나이에 가졌음직한 즐거움의 모든 기회와 권리를 받탈당합니다. 소중한 유년 시절을 송두리째 빼앗긴 로비는 ‘기드온’이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강요받습니다.
다섯 살 아이가 자신을 유괴한 남자로부터 배운 것은 ‘복종’이었습니다. 로비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당연히) 체스터입니다. 로비는 폭력과 학대에 굴복하고 스스로를 ‘대디 러브’라 칭하는 유괴범으로부터 관심과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합니다. 육 년 후, 로비는 대디 러브가 (자신 말고도) 다른 아이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누군지도 모를 그 아이에게 질투를 느낍니다.
이야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로비가 살아가는(생존하는) 방식을 스스로 깨우친다는 사실입니다. 유괴당한 아이, 학대당하는 아이에서 로비는 스스로를 변화시킵니다. 로비는 자신(의 안전)을 위태롭게 만들 뻔했던 담임선생님의 집에 불을 지릅니다.
로비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로비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유괴한 대디 러브의 눈에 들어야 했고 그의 만족을 위해 노력해야 했습니다. 현실에서 비롯된 부조화는 로비를 괴롭혔을 테고 로비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유괴범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내며 자기합리화를 시도합니다. 자신도 대디 러브를 원한다고 믿기까지 합니다.
로비에게 탈출을 시도하도록 부추긴 건 ‘죽음에 대한 공포’였습니다. 대디 러브가 다른 아이를 유괴하지 않았다면, 로비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면, 로비에게 ‘경쟁 상대’에 대한 걱정이 없었다면, 과연 대디 러브를 벗어나고 싶어 했는지 의문입니다. 다른 아이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자신이 어떤 취급을 받을지 알고 있었기에 로비는 전략을 바꿉니다. 이 역시 ‘살아남기’ 위해서죠.
로비는 결국, 다시 부모의 품으로 돌아옵니다. 해피엔딩을 암시하는 엔딩이지만 결말이 실제로 품고 있는 의미는 약간 다릅니다.
로비는 예전의 로비가 아닙니다. 물론 육 년이란 시간이 흘렀으니 당연한 소리겠지만 대디 러브와 함께 살았던 육 년 동안의 경험은 아이의 영혼을 뒤흔들고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습니다. 악몽은 깨어나면 되지만 악몽 같은 현실은 삶 전체를 아우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다이나’의 모습은 아무 것도 아니면서 소름이 돋습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무서운’ 장면이며, 최근에 읽은 소설 작품들 중에게 가장 ‘충격적인’ 엔딩입니다.
작품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다이나’가 쇼핑몰에서 로비를 유괴당하고 그 후의 혼란을 그린 첫 부분을 지나면, 유괴범과 로비의 생활이, 그리고 육 년이 지나 로비가 탈출을 하고 부모와 재회하기까지의 이야기가 그려집니다.
‘조이스 캐롤 오츠(Joyce Carol Oates)’는 ‘악’을 전면에서 다루는 것이 장기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작가의 시선은 약간 비껴나 있습니다. 비슷한 소재로 완성한 중편, 《옥수수 소녀(the Corn Maiden)》에서 범인에게 포커스를 맞춘 것과는 달리, 이 작품에서의 작가의 관심은 아이를 유괴당한 부모의 황폐해진 삶이나 유괴범의 심리나 동기 같은 것에서 벗어나 ‘악’의 주변으로 향합니다.
작가의 시도는 꽤 성공적입니다. 원하지 않았던 나쁜 경험이나 강제로 경험하게 되는 ‘악’은 삶 전체를 뒤흔들고, 절대 잊히지 않는 기억은 사는 동안 내내 우리를 고문합니다.
로비의 불행은 ‘유괴’라는 사건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가족들과 평범한 삶으로부터 격리된 ‘육 년’이란 시간도 뛰어넘습니다. 그 어마어마한 ‘악의 파장’이 단순히 불가항력에 의한 것이었고 그 우연한 사건이 로비의 삶 전체를 관통할 테지만, 정작 로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최선이 언제나 최선은 아니고, 혼자만 바르게 산다고 영원한 안녕을 보장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대체로 불확실하며 미지의 것, 그 자체로 ‘공포’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두려움과 염세적인 관점이야말로 이 작품의 미덕인 것 같습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빛’보다 ‘그림자’를, ‘양지’보다 ‘음지’를 부각시키고 싶었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작가의 이런 의도는 독자들에게 ‘경고’의 의미를 갖습니다. 요즘은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생존하는’ 것이 점점 중요한 화두가 되어가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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