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읽기_책

미녀_렌조 미키히코-리뷰

달콤한 쿠키 2018. 6. 22. 07:18


추리소설로 데뷔했고 나중엔 연애소설에 집중했다는 ‘렌조 미키히코(連城三紀彦)’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된 작품집입니다. 추리소설 작품집이라고 소개되긴 했지만 여덟 편의 작품들 중, 추리소설의 모양새를 갖춘 건 단 두 작품뿐입니다. 그것들조차 추리문학의 정통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요. 이 작품집에 실린 작품들은 작가의 경력이나 다른 저작들을 참고한다면 추리소설보다 로맨스소설에 가깝습니다.


작품집을 꿰뚫고 있는 중요한 소재는 ‘불륜’입니다. 바람난 남편, 숨겨둔 애인이 있는 아내들은 각 작품들의 소재이면서 배경, 화두, 이야기의 설정으로 등장합니다.

이야기들 속에서 불륜이라는 소재는 일종의 반면교사(反面敎師)의 역할을 합니다. 부도덕한 관계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서 진정한 사랑의 가치를 강조하고, 그 감정의 본질을 성찰하게 만듭니다.

몇 작품들은 꽤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저 같이 단순한 독자라면 약간 기괴한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고요. 무엇보다 ‘연애소설’이라는 장르 안에서 갈등 요소로서 불륜 이상으로 효과적이고 막강하며 사용하기 수월한 소재가 어디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작품집의 포문을 여는 <야광의 입술>은 우리가 타인을 정말로 사랑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그 사람의 어디가 좋냐’고 물을 때 가장 흔한 대답은 ‘몰라’일 것입니다. 구체적인 것을 캐묻는다면 성격이 좋다거나 다정하다거나 알뜰하다거나, 그런 대답이 나오겠지만, 우리는 왜, 하필 그 사람을 사랑하는지에 대해선 정말 오리무중입니다. 

이 작품은 어떤 부부를 중심으로 한 기괴한 관계들을 통해 안개 속의 무언가에 접근하려 합니다. 결국 독자들이 발견하는 건 이야기만큼이나 기괴하지만 어떤 면에선 숙고의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그 사람을 닮고 싶어서 사랑한다는 결론은 무수한 가설 중의 하나겠지만, 살다보니 서로를 닮아가는 평범한 부부들을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합니다.


<희극여배우>는 일곱 명의 인물로 시작되었다가 결국 한 사람의 이야기가 되는 결말이 인상적입니다. 작가는 이야기를 진행시키면서 인물들을 한 명씩 소거해 나갑니다. 도발적인 상상력과 기묘한 분위기, 영리한 이야기 진행은 남다르지만 설정이나 결말이 다소 억지스럽습니다.


<밤의 살갗>은 암으로 죽어가는 아내로부터, 수십 년 전, 자신을 계획적으로 죽이려고 했다는 고백을 듣게 되는 남편의 이야기입니다. 추리소설, 혹은 서스펜스 소설이 연상되는 설정이지만 이 작품은 의외로 서정적이고 차분합니다. 관계의 진정성, 피상성과 그 이면, 화해와 용서, 그리고 용기 등의 가치를 전합니다.


‘가족’이라는 집단의 실체를 곰곰이 생각하게 만드는 <타인들>은 남처럼 사는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과장된 설정과 지나치게 극적인 인물들을 통해 작가는 보편적인 가정의 정서와 심리를 담아냅니다. 서로를 밀쳐내고 ‘혈연’이라는 운명적인 관계를 부정하는 인물들은 난관을 거치며 결국 한 울타리 안에 안주하려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고리타분한 결말이지만 가족 구성원들 간의 애증, 양가적인 감정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습니다.


<밤의 오른편>은 서스펜스 소설의 모양새를 갖춘 작품입니다. 한 부부가 공갈과 음모에 현혹되어 서로를 살해하기까지의 과정을 긴장감과 수수께끼 넘치게 담았습니다.

이 작품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범인의 동기나 살해 과정 등의 추리소설의 외적인 부분이 아닙니다. 작가는 우리의 행동들이 과연 완전한 우리의 의지에 의한 것인지, 혹시 외부의 어떤 영향에 의해(타의에 의해) 결정되거나 영향을 받은 결과는 아닌지 묻습니다. 우리의 어떤 행동이 스스로의 의지나 결정과는 상관없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또 어떤 행동과 결정을 내리게 될까요. 이 작품은 마치 ‘인지부조화’에 대한 문학적 텍스트로 읽힙니다.


일정한 서사 없이, 강한 이미지로 일관되는 <모래 유희>는 꿈처럼 몽롱하고 모호한 작품입니다. 권태기의 부부와 각자의 연인들을 등장시켜, 잃어버린 욕망과 그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며 우리의 삶은 모두 연기이고 우리는 삶이라는 무대의 배우들이 아닐까, 하는 감상을 남깁니다. 카메라 앞의 두 인물은 부부이기도 하고 불륜의 연인이기도 합니다. 이런 불확실한 관계의 설정은 상황이나 처지에 따라 태도나 모습을 바꾸는 이중적인 인간성, 정체성의 혼란 등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밤의 제곱>은 전형적인 추리소설의 플롯을 따릅니다. 같은 시각에 다른 장소에서 죽은 두 여자와 두 살인 사건의 범인이라고 자처하는 남자, 그리고 경찰이 등장합니다. 모호한 증언들을 번복하는 남자 앞에서 경찰은 난관에 처합니다. 두 여자가 죽은 현장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 범행 시각은 거의 같기 때문이지요.

이 작품은 ‘누구’에 집중하지 않고 ‘왜’와 ‘어떻게’가 핵심입니다. 결말에 이르면 수수께끼의 답이 제시되기는 하는데, 범인의 동기에 대해서는 약간 의심스럽습니다. 왜 증언을 번복해야만 했는지에 대해서는 특히 더 작위적이죠.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완벽한 퍼즐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이야기의 부피에 비해 질량은 허술한 느낌입니다.


마지막 작품이면서 표제작인 <미녀>는 가장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처제와 불륜을 일으킨 주인공은 아내의 의심을 잠식시키기 위해 단골 술집의 주인에게 부탁을 합니다. 아내 앞에서 한 번만 자신의 애인인 척해달라는 거죠. 처제와 바람이 난 것도 그렇지만 ‘바람은 피웠어도 그 상대가 처제는 아니’라는 걸 아내에게 증명해야 하는, 약간 괴상하고 망측한(?) 설정을 극복한다면, 그리고 행간에 드러나는 다소 가부장적인 철학과 쓰고 버려지는 여성성의 한계 등을 용서한다면 이 작품은 인간관계와 그 안의 갖가지 감정들에 대한 빛나는 통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물들이 보이는 공격성과 질투, 이기심, 회피와 부정 같은 심리적 화두들도 이야기에 잘 녹아들어 있고요.




이 작품집엔 옥석이 섞여 있습니다. 반전이나 의외의 결말에 치중한 ‘깜짝 쇼’ 같은 작품들도 있지만, <미인>이나 <야광의 입술>, <밤의 오른편>, <타인들> 같은 작품은 읽고 나면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는 게 쉽지 않을 정도로 여운이 깁니다.


잠깐 언급했지만, 작품들 안에 보이는 여성성에 한계가 있습니다. 여자 인물들은 가정 파괴범이고 남자들을 유혹하는 팜프 파탈(femme fatale)들이죠. 그렇지만 ‘여성 비하’라거나 ‘성 차별’ 등의 논의가 거론될 여지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 남자들은 대부분 나약한 바보이거나 뻔뻔하기 짝이 없는 무뢰한들뿐이니까요.


‘불륜’이라는 관계, 즉 결혼이라는 제도적 장치 안에 있으면서 그 법적인 구속력을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을 너무 천편일률적으로 그린 것이 다소 거슬리지만, 작가가 아마도 그 관계를 어리석고 무책임한, 완전히 그릇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사족.


1. 수식어에 수식구가 붙고 단문들을 쉼표에 쉼표로 연결되어 지나치게 긴 문장들은 번역의 문제라기보다 작가의 문체가 그런 스타일인 것 같습니다. 처음엔 읽기가 곤혹스러웠으나 차츰 적응은 됩니다. 작가의 작품들을 읽으실 계획이라면 이 점 염두에 두시길.


2. ‘긴 문장’과 ‘만연체’ 문장의 차이를 모르겠어요.


3. 렌조 미키히코는 2013년에 이미 고인이 됐습니다. 늦었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런 뜻에서 다른 작품들도 찾아 읽어봐야 할까 봐요. 이 작품집도 그리 나쁘진 않았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