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읽기_책

잘가라, 서커스_천운영-리뷰

달콤한 쿠키 2018. 6. 22. 07:30


‘윤호’는 형 ‘민호’에게 일종의 부채감을 안고 사는 사람입니다. 어릴 적 형의 목소리를 앗아간 사고에 얼마간의 책임이 있기 때문인데, 그로 인한 죄책감과 부채의식에 거의 평생을 사로잡혀 있으면서 그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육체적으로 반(半)불구인 형이 짝을 만나면 자신이 좀 자유로워질까 싶지만, 형의 결혼은 오히려 윤호의 발목을 잡고 맙니다. 형수가 된 조선족 여자, ‘해화’에게 윤호는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되니까요.


해화는 한국에 시집을 오게 됐지만 첫사랑의 기억을 품고 있는 사람입니다. 속초에 있을지도 모르는 그에 대한 그리움은 고향을 향한 향수와 맞닿아 있습니다. 민호와의 결혼 생활은 처음엔 괜찮았지만, 다정했던 시어머니가 죽고 시동생인 윤호마저 중국으로 떠나버리자 난폭해진 남편 때문에 고생이 시작됩니다. 그 후, 가출을 단행한 해화는 더 큰 고생에 발을 들이게 됩니다.




‘천운영’의 ‘첫’ 장편소설인 이 작품은 각 장마다 윤호와 해화의 시점을 오갑니다. ‘국제결혼’을 기둥 소재로 삼고는 있지만 그 소재에 대한 사회적 이슈나 국가, 민족, 이념, 그리고 우리의 근대사 같은 담론은 피해 갑니다. 그런 소재들에 대해 공론화할 여지는 충분해 보이지만, 작가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철저히 내면적인 서사를 택합니다. 이 작품은 처절한 사랑 이야기에요.


미리 적자면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중국으로의 맞선 여행을 떠나는 형제의 모습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독자의 마음을 간질였다가 생채기를 냈다가 어루만지기를 반복합니다. 엇갈린 사랑에서 비롯된 긴장의 고삐를 작가는 시종일관 단단히 부여잡습니다. 작가는 노련한 필력으로 세 인물들을 서서히 불행으로 몰고 갑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끝나면 이 사람들이 왜 불행해져야 했을까 궁금해집니다. 어디서 잘못된 걸까. 그들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가 과연 뭘까요.


차 떼고 포 떼고 보면, 이야기의 골격이 드러납니다. 전형적인 삼각관계죠. 형과 형수, 그리고 형수를 사랑하게 된 시동생. 세상에. 형수와 시동생이라니, 형이 죽은 것도 아닌데 말이죠. 충분히 껄끄럽고 도발적이며 위험한 설정입니다. 완전히 있을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이런 저런 이유로 그런 감정이나 관계에 마음을 열기는 아직 어렵습니다.


그런데 형수와 시동생의 감정은 이야기 안에서 먹힙니다. 독자로서 ‘이런 망측한’ 하면서 그것에 너그러워지죠. 작가가 인물들과 설정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기도 하지만, 독자로서 두 사람을 받아들이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던 이유는 따로 있을 것 같았습니다. 과연 난데없는 너그러움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요?



타인의 ‘대상화’는 분명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지만, 이 작품 안에서, 그리고 작중의 형제에게 해화는 그 신세를 면하지 못합니다. 국제결혼이 모두 그렇지는 않겠지만, 이 작품에서 보이는 식의 결혼은 일종의 ‘매매혼’과 다른 게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돈을 들여 사는 거죠. 사온 물건에 대해 원래 주인은 민호이지만 윤호가 탐을 내도 됩니다. 마음 넓게 민호가 양보를 하고 다른 물건을 사올 수도 있습니다. 돈이 들 테지만 크게 문제될 건 없죠.


이런 의식을 갖고 있는 것 자체가 미안한 것 이상으로 소름끼치는 일이지만, 그건 작가의 탓이기도 합니다. 작가가 그리고 있는 해화라는 여자는 실체가 없습니다. 도무지 현실적이지가 않아요. 발해의 공주에게 스스로를 이입시키는 장면에선 혹시 ‘공주병’이 아닌가, 농담 같은 의심도 하게 됩니다. 처절한 감정에 시달리면서 속내를 밑바닥까지 보여주려 하고 있지만 어딘지 흉내를 내고 있는 느낌입니다.

일례로 이 사람이 시달리는 ‘그리움’의 대상을 보세요.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고향의 유적지에서 만난 남자는 그저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동생인 윤호에 대한 감정도 모호합니다. 실체도 감정도 얄팍한 해화는 이야기 안에서 그냥 소비됩니다. 인물의 희미한 개성은 해화가 돈을 받고 ‘팔려 왔다’는 설정과 맞물려 이야기 안에서 허투루 대해도 괜찮은 ‘소재’가 되어 버립니다.


윤호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입니다. 형에 대한 윤호의 감정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자신에게 집착하는 형에 대한 증오는 사랑, 죄책감과 책임감을 때때로 능가합니다. 하지만 엄마를 향해 표출되는 증오는 그 이유를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대체 왜 그런 건가요. 엄마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은 대체 어디서 비롯된 건가요. 단지 당뇨를 앓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야기에 설득될 만한 증거들을 원합니다. 지금 읽는 이야기가 ‘그럴싸하길’ 바라죠. 하지만 지금으로선 인물에 동화되고 감정에 이입하는 게 약간 어려워요. 형의 결혼을 서두르고 엄마가 죽은 후 생업까지 내팽개치고 중국으로 떠나는 윤호는 그냥 짜증나고 싫증난 걸로 보입니다. 윤호의 행동들은 극적이지 않아요. 그냥 삶에 투정을 부리다 일탈을 하는 거죠. 그 욕망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요. 그런데 왜 하필 중국으로 간 걸까요.

그러니 형수에 대해 난데없이 연정을 품는 것도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됩니다. 순수해 보이질 않는 거죠. 형수가 중국에서 팔려온 조선족이라서, 그리고 그 남편이 장애를 갖고 있어서 ‘쉽게’ 보였던 게 아닐까요? 만약 해화가 조선족이 아니라 그냥 ‘한국 여자’였다면 과연 ‘형수’가 아닌 ‘여자’로 보였을까요. 그런데 왜 하필 조선족 여자였을까요. 이 이야기에 조선족 인물이 왜 필요했던 거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약자인 조선족 여자라는 인물을 두고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이런 이야기밖에 없었던 걸까요.


그런 맥락에서 ‘민호’라는 캐릭터는 작품 안에서 홀대받은 느낌입니다. 민호에 대해 작가는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공정하지 못한 거죠. 이 사람이 난폭해지는 모습 이면엔 민호가 싸워왔고 견뎌야 하는 소외감이나 두려움, 외로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뜬금없이 아내의 손발을 묶는 행동은 무엇에서 비롯된 걸까요. 물론 작가는 언급을 하고는 있지만 삼각관계의 한 축으로서 이 사람을 충분히 다루지는 않습니다. 그 배경들을 무시하고 ‘괜히’ ‘나쁜 남편’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해화에게 도망갈 핑계를 만들어줍니다. 이 사람이 죽고 나서야 윤호가 비로소 자유로워진다는 결말도 찝찝합니다. 윤호의 발목을 붙든 건 형이 아니라 ‘그 자신’이니까요.


결국 남는 건 드라마틱한 설정과 얄팍한 멜로드라마, 그리고 그 안의 꼭두각시들입니다. 숲은 못 보고 나무만 보고 있는 작가는 ‘독자들에게 질문은 하지 말고 그냥 따라오라’고 주문합니다. 하지만 잠자코 따라가던 독자들은 돌부리에 발이 툭툭 걸려 불편합니다. 미려한 심리묘사나 처절한 감정들, 작품 전반에 깔린 어두운 정서와 불안감 등은 모두 액세서리에 불과합니다. 그것들 자체가 문학작품이 될 수는 없는 거죠.




소설, 영화를 막론하고 좋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작품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독자, 혹은 관객을 붙들 수 있는 힘을 갖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책장을 덮거나 막이 내려간 후에는 어떨까요. 이야기의 주술은 여전히 유효할까요? 그런 작품도 있고 그렇지 않은 작품도 있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즉 끝이 나기도 전에 주술이 깨져 야유를 하게 되는 경우는 예외로 하고 말이죠.

천운영의 이 소설은 어떠냐 하면, 이야기의 최면이 짧습니다. 최면이 깨지면 작품의 허점이 드러나기 시작하죠. 마지막 책장을 덮고 얼마 안 지나 속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곰곰이 이야기를 되새기며 인물들에게 질문을 퍼붓습니다. ‘도대체 왜?’


천운영은 대단한 문장가입니다. 염세적인 톤(tone)도 작가의 개성 중의 하나입니다. 독한 말도 아무렇지도 않게 인물들을 향해, 그리고 그들에 대해 툭툭 내뱉는 문장은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이런 장점들은 작가의 단편에서 분명히 확인되죠.


하지만 이 작품엔 ‘뼈’가 없어 보입니다. 처절한 분위기도 약간 과장된 느낌이죠. 마치 (죽은 반려동물도 아니고) 키우다 시든 화초를 두고 요란한 장례식을 치르는 것처럼요. 물론 이 작품을 위해 작가가 들인 공과 노력, 발품은 능히 짐작이 됩니다. 연변 사투리나 ‘따이공’의 삶 등은 철저한 조사와 공부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그런 게 작품 자체가 될 수 없다는 건, 더 말 할 필요도 없겠죠.




사족.


1. 이 작품보다 나중에 발표된 장편, 《생강》도 감상이 비슷했습니다. 천운영이 단편소설에 머물지 않고 진정한 작가로 거듭나기 위해서 필요한 건 뭘까요. 음... 제 생각일 뿐이지만 ‘밖으로 빠져나와 다시 보기’인 것 같습니다. 이야기에 지나치게 빠진 작가는 종종 밖의 독자들을 잊게 되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단편보다 분량이나 호흡이 더 긴 장편소설에서 그 단점은 더욱 두드러지겠죠.


2. ‘백가흠’의 단편, <쁘이거나 쯔이거나>와 공통점이 많습니다. 두 작가에게 예의가 아닌 건 알지만, 인물이나 설정 등이 겹쳐 아무래도 비교하게 되네요. 저는 어느 쪽이냐 하면, 베트남 아내(형수, 혹은 며느리)를 등장시켜 여성에 대한 폭력, 인간의 악을 고발한 백가흠의 단편에 손을 들어줘야겠습니다. 연애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제 취향의 문제는 별개로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