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 섬, 여덟 명의 사람들, 고립, 살인. ‘곤도 후미에(近藤史惠)’의 이 데뷔작은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의 걸작,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And Then There Were None)》를 닮았습니다. 위에 열거한 키워드만으로도 대강 어떤 이야기일지 상상이 갑니다. 그리고 작품은 그 상상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시작은 꽤 좋습니다. 여덟 사람이 휴가를 위해 멋진 별장이 있는 섬으로 갑니다. 그 섬이, 몇 년 전, 신흥 유사(사이비) 종교의 발원지이자 주무대였고, 바로 그곳에서 집단 자살 사건이 일어났다는 배경도 왠지 으스스하니 추리소설의 무대로서 별로 나쁘진 않습니다.
사랑과 질투, 불륜, 우정과 배신 등의 감정으로 점철된 인물 관계도 괜찮습니다. 구태의연하긴 해도 감정이 풍부할수록 살인은 더 복잡해지고 이야기는 더 흥미진진해질 테니까요.
인물들의 드라마가 진행되고 감정이 쌓이면서 기다리던 첫 번째 살인이 터집니다. 주인공이 불륜 관계에 있던 유부남의 부인이 살해되고 그 심장이 사라집니다. 게다가 살해 현장은 밀실이죠.
썩 근사하진 않아도 책을 붙들고 있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장르의 전형성이 진부해 보이긴 해도 추리소설을 읽으며 달리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 이하 스포일러가 나옵니다. 이 작품을 읽으실 분들은 넘어가시길 ***
하지만 작품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매력이 떨어집니다. 말이 안 돼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인물들 때문이죠. ‘아야메’는 ‘도리코’를 절절히 사랑하면서 친구인 ‘토끼 군’과 아무렇지도 않게, 게다가 별 감정도 없이 섹스를 합니다. ‘나나코’의 시체가 발견되고 모두들 겁에 질려 서둘러 섬을 빠져나갈 법한데, ‘무쿠’는 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교통편인 모터보트의 키를 바다에 던져 버리며 스스로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마저 섬에 고립시킵니다. 살인마에게 도전을 외치면서요. 이게 말이 됩니까? 이쯤 되면 코미디죠.
한 번 어긋나기 시작하자 읽는 게 힘들어집니다. 사사건건 트집 잡을 일이 생기고 행동의 동기는 모호해 보이고 계속 발견되는 시체엔 감흥이 없습니다.
또 트집을 잡아볼까요. 애초에 이 섬으로의 여행은 범인이 계획한 게 아니었습니다. 어쩌다 얻어걸린 거죠. 그리고 무엇보다 범인의 동기란 게 너무 억지스럽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랑을 위해 살인이란 위험한 짓까지 저지를 수 있다면, 그 사랑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습니다. 가장 쉬운 일은 아내와 이혼을 하는 거죠. 하지만 범인은 ‘살인을 위한’ 살인을 합니다. 이 작품의 살인은 ‘추리소설을 위한’ 살인에 불과해요. 지나치게 작의적인 거죠.
아무리 추리소설이라도 이렇게 인공성이 두드러지면 공감이 어렵습니다. 추리소설 또한 문학의 범주에 있기 때문이죠. 추리소설은 수수께끼나 단순한 퍼즐이 아닙니다. 인물이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문학’이란 말이죠.
대체 왜 작품이 이 모양이 됐을까요. 작가가 추리소설이란 장르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소위 ‘장르의 법칙’ 안에 갇힌 인물들은 기계적인 행동만 합니다. 특이한 상황이라면 사람들의 행동은 보편성을 유지하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지키기 힘들수록 사람들은 더욱 그것에 집착하려는 경향을 보이죠. 하지만 이 사람들은 좀 특이합니다. ‘살인’과 ‘고립’이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인물들은 이성을 상실한 정도가 아니라 유별난 반응을 보입니다. 히스테리는 귀여울 정도죠.
추리소설로서의 한계를 이 작품은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열쇠를 이용한 밀실 트릭은 단순하지만 명쾌한 구석이 있고, 피 묻은 칼에 대한 트릭 역시 봐줄만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범죄’만 있고 ‘이야기’는 없습니다.
결국 ‘누가’, ‘왜’, 그리고 ‘어떻게’의 문제인데, 이 작품은 ‘누가’와 ‘어떻게’에만 집중합니다. 장황하게 덧붙인 결말에서 ‘왜’의 문제가 다뤄지긴 하는데, 이미 늦었습니다.
‘왜’의 문제는 추리소설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것을 소홀히 하면 단편적인 ‘범죄와 그 해결’만 남기 때문이죠. ‘왜’의 요소들은 작품이 추구하는 ‘이야기’의 본질입니다. 그것은 작품 전반에서 다뤄져야 합니다. 물론 살인의 주요 동기인 ‘사랑’은 작품 전면에 드러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야기의 동력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결말이 아무리 처절하고 대단한 반전을 시도하고 있어도 수상쩍게 보이는 거죠.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이 작품의 결말은 나름 독자들의 뒤통수를 치기 적당하지만 너무 과합니다. 따로 노는 것이 마치 특별부록 같습니다. 결말을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앞에 뭔가 대단한 일들이 벌어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습니다. 자기네들이 (스스로) 만든 고립된 상황에서 몇 명이 죽어나간 것뿐이죠. 마지막에 아무리 힘을 주어도 생뚱맞기 짝이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을 택하는 연인들의 이야기, 비극으로 끝나는 사랑 이야기는 숱하게 많습니다. 실제로도 뉴스나 신문 지상에 자주 오르내리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 작품의 사랑은 독자로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섬뜩하리만치 처절한’ 감정을 보여주고야 말겠어, 라는 작가의 다짐이 보이기는 하는데 역부족입니다. 활자 상으로는 말이 되지만 피와 살이 흐르는 독자들은 그 감정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이야기는 실제 삶, 그 이상(larger than life)’이라고 되받아친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 ‘탐미주의적인 결말’이라고 우겨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현실에 뿌리를 두지 않은, 공중에 붕 뜬 이야기나 감정은 사상누각일 뿐이라 위태롭게 보입니다. 독자로서 공감하기도 어렵습니다.
완성도의 측면에서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단서는 어느 정도 면죄부가 됩니다. 어느 정도 서툴고 말이 안 되는 부분이 더러 발견돼도 ‘처음이니까’하고 넘어갈 수 있다는 얘기죠. 하지만 자국인 일본의 본격추리문학 시장에서 ‘에도가와 란뽀(江戸川乱歩)’와 쌍벽을 이루는 ‘아유카와 데스야(鮎川哲也)’를 기리는 문학상을 수상했다면 말은 좀 달라집니다. 다른 여러 작품들을 따돌리고 상을 받았으니까요. 수상작 수준이 이 정도라면 독자들은 그 문학상에 대해 의심을 하게 되죠.
어찌 됐든 곤도 후미에는 지금 자국에서 잘나가는 사람이고, 작가의 최고 히트작,《새크리파이스》는 언제, 어느 페이지부터 읽어도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의미는 그런 사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사람도 한때는 이런 작품도 썼다. 이 정도의 의미 말이에요.
사족
애거서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the Murder of Roger Ackroyd)》을 연상케 하는 클라이맥스가 등장합니다. 물론 결말에서 뒤집어지지만요. 여러모로 곤도 후미에의 이 데뷔작은 애거서 크리스티에게서 받은 영향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역시 크리스티의 영향력은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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