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년 전, ‘메어리’는 차 사고로 남편을 잃었습니다. 아빠와 함께 그 차를 타고 있던 의붓아들 ‘스티븐’은 목숨은 겨우 건졌지만 사족을 못 쓰는 처지가 되어 계모의 보살핌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래저래 힘든 일이 많지만 메어리에게 가장 힘든 건 죄책감입니다. 문제를 일으킨 아들을 기숙학교에 보내자는 아이디어는 메어리의 것이었고 그 일이 아니었다면 차 사고를 피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죠. 메어리와 스티븐은 비록 친모자는 아니었지만 사이가 무척 돈독했으니, 의붓아들에 대한 메어리의 죄의식은 남달랐을 겁니다.
그러던 메어리는 ‘톰’이라는 청각장애소년에게 아동심리학자로서 관심을 갖게 되는데, 보호시설을 도망친 톰은 메어리를 찾아왔다가는 갑자기 사라집니다. 아이가 사라진 후, 메어리는 악몽과 환영과 환청에 시달립니다. 메어리는 미쳐가고 있는 걸까요. 아이는 어디에 있고 메어리의 주변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비교적) 젊은 여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전형적인 하우스 호러/스릴러 영화입니다. 이런 부류의 영화들은 색채와 개성이 비교적 분명한 편입니다. 한정된 무대, 내면의 갈등에 천착한 주제와 스토리, 혼자 고군분투하는 여주인공. 거의 이런 영화는 여성 관객들을 주로 모시고 싶어 하고요.
다분히 여성적인 영화라 위험하고 화려한 액션보다는 인물들의 동기와 심리, 분위기에 공을 많이 들인 티가 나지만, 결론부터 적자면 알맹이가 빠진 느낌입니다.
영화 곳곳엔 심리학 화두들이 숨어 있습니다. 일단 메어리는 일에 치여 사는 여자입니다. 심리상담이란 돈벌이도 해야 하고 집안도 살펴야 하고 아들도 거둬야 하니까요. 육체적인 일도 그렇지만 정신적인 노동은 더 심합니다. 사고를 당해 수족을 쓰지 못하는 의붓아들에 대한 죄책감, 책임감,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자유와 새출발을 향한 개인적 욕망이 이 사람의 내면에서는 치열하게 자리다툼을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메어리의 무의식엔 죽은 것과 다름없는 스티븐이 실제로 사라지길 열렬히 원할 수도 있어요.
스티븐이 메어리에게 ‘죽은 과거’라면, 청각장애소년 톰은 ‘살아 펄떡거리는 미래’입니다. 톰에게 갑자기 집착하게 되는 이유도 그를 통해 가까스로 미래의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메어리는 앞으로 나가고 싶어 하지만 죽은 과거가 발목을 붙잡습니다. 메어리가 시달리는 양가감정은 지독히도 치명적입니다.
그런 새엄마가 스티븐은 못마땅합니다. 스티븐은 자신을 사랑해주던 새엄마를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기는 것이 두렵습니다. 스티븐은 앞서 아빠의 상실을 이미 겪었으니, 새엄마에 대한 집착은 더욱 절실합니다. 스티븐은 새엄마의 관심을 사로잡거나 유혹하는 상대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제거하려 합니다. 이런 파괴적 욕망에 오이디푸스적 갈등까지 더해져 스티븐은 거의 악마적인 폭력성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이런 내면적인 갈등들, 전면에 드러나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감정들, 예쁜 화병 속에서 썩어 문드러지는 꽃들처럼 인물들의 내면을 갉아먹는 악마성에 가까우면서도 지극히 인간적인 본성들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관객들이 보기엔 비약이 심하고 드라마가 부족합니다.
플롯에 심각한 구멍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일단 의문을 갖기 시작한 관객들은 두 인물 어느 누구에게도 감정이입이 어렵습니다. 그 결과 영화는 설정과 결말만 남게 됩니다. 정작 영화가 힘을 쏟아야 할 전개 부분에서는 중요한 맥은 짚어내질 못하고 허방다리만 내지르고 있습니다.
메어리와 스티븐의 관계가 계모와 의붓아들이라는 설정도 마음에 걸립니다. 영악하게 곤란한 점을 피해가려는 의도로 보이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이야기의 작위성이 두드러집니다.
‘나오미 와츠(Naomi Watts)’나 ‘올리버 플랫(Oliver Platt)’ 같은 훌륭한 배우들이 좋은 연기를 보여줍니다. 연기나 연출의 문제처럼 보이지는 않고 영화의 허술한 모양새는 시나리오가 치밀하지 못한 탓처럼 보입니다. 한때는 '아직 영화화되지 않은 가장 훌륭한 시나리오 리스트'에 올랐다고 하던데, 어쩌면 지나친 편집 때문이었거나 사전 작업 과정에서 시나리오의 신(scene)을 너무 많이 쳐낸 탓일 수도 있겠죠.
사족
조역으로 나온 ‘데이빗 큐빗(David Cubitt)’이란 배우 때문에 본 영화입니다. TV시리즈 《미디엄(Ghost and Crime)》에서 ‘리 스캔런’ 형사로 나왔던 그 사람,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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