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을 하고 자식들에게 경제력을 의존해야 하는 노부부, 임신한 몸으로 이혼당해 싱글맘이 된 딸, 이제 졸업반인 막내, 그리고 장남.
평범한 가정입니다. 딱히 부자도 아니고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않은, 일일드라마가 보여주는 행복의 판타지를 제공하지도 않으면서 막장드라마의 갈등도 없습니다. 영화는 이런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합니다.
타인의 소소한 일상을 엿보는 재미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사건 없이 진행되는 영화는 슬슬 불행의 밑밥을 뿌리기 시작합니다. 딸이 홀로 낳고 키우는 아이는 자폐를 의심할 정도로 부산스럽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학자금 대출을 갚아야 하는 막내는 새벽에 대리운전을 합니다. 자식들은 엄마의 생일을 까먹고 동거 중인 막내의 여자친구는 임신을 하고, 딸의 심장병은 악화되고, 장남은 ‘명퇴’를 당해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됩니다.
획기적인 아이디어나 극적인 구성에 매달리지 않은 이 영화의 무기는 오로지 서사에 의존합니다. 하지만 그 서사란 것도 특별한 게 없습니다. 주위에서 흔히 일어나고 신문지상에서 자주 보도되는, 그런 소시민의 삶이 전부입니다. 영화에게서 약간 날(生) 것의 냄새가 나는 이유는 잔뜩 치장되거나 가공되지 않은, 평범하고 익숙한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용하고 무난한 진행에 극적인 순간에도 과장하지 않는 배우들의 절제된 연기가 무척 인상적입니다. 평범한 가정에 위기가 닥치고 서서히 몰락해가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는 참담하고 우울한 여운을 남깁니다. 영화는 평범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소시민적인 삶이나 그들의 한을 담으려는 의도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행복’의 보편적인 가치와 그것을 손에 넣는 과정이 정말 험난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집중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사소하고 작은 평안조차 타고난 인간성에 내재된 한계들에 의해 방해를 받습니다. 그것들은 너무 인간적이라 대놓고 탓하기도 어렵습니다. 불가항력에 맞서는 저들은 곧 우리이고 우리들은 곧 저들입니다.
옥의 티처럼 거슬리는 점이 있습니다. 대리운전 중에 일어난 막내의 사고는 두려움 앞에 무너지고 마는 인간의 나약한 심성, 위태로운 양심, 이기심에 대한 사고를 촉발합니다. 구조적으로도 국면을 전환하고 이후의 극적인 사건들에 대한 원인을 제공하죠. 아무래도 이건 영화이니까요.
하지만 이야기의 전개에 도움이 되었다 하더라도 플롯 상에서 다소 튑니다. 상해치사 사건을 사체유기까지 끌고 갈 필요는 딱히 없어 보입니다. 인간의 행복을 방해하는 불가항적인 사건은 아니기 때문이죠.
게다가 거의 모든 영화적 사건에 장남인 ‘인철’이 연루되는 것도 마뜩치 않습니다. 이 영화가 ‘장남’이란 제목을 달고 있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요. 장남의 존재나 역할을 강조하고 부각시키려는 의도는 짐짓 이 영화를 오해하게 만듭니다. 장남이라는 존재의 중요성은 곧 가부장과 연결되고 결국 고리타분한 가족의 정통성을 주장하려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하지만 이 영화가 말하고 싶어 하는 건 그 이상입니다.
이 사람들은 결국 어떻게 될까요.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한 결말로 미루어 법의 심판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럼에도 이들이 행복해지길 바라는 건 과욕일까요. 엔딩을 장식한 눈처럼, 세상 모든 것이 눈에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차이에 비로소 관대해질 수 있을까요.
용기를 내라는 말 외에 달리 건넬 위로가 참으로 궁색합니다.
사족
막내, ‘인호’가 정신과 치료를 시작한 후로 임신한 여자친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엔딩 즈음에서 짧게나마 언급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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