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커스의 바람잡이 정도 되는 ‘스탠’은 독심술 쇼로 유명한 ‘지나’의 알코올중독자 남편 ‘피트’를 실수로 죽게 만듭니다. 남편이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기를 바라는 지나의 눈을 피해 몰래 건네준 것이, 술이 아니라 ‘메틸알코올’이었기 때문인데, 스탠은 그 일을 비밀로 합니다.
피트의 죽음으로 인해 생각지도 못했던 기회가 스탠에게 찾아옵니다. 지나는 스탠에게 남편의 빈자리를 채워줄 것을 제안하고, 스탠은 지나로부터 독심술의 비결인 ‘코드 읽기(일종의 트릭)’를 배우게 됩니다. 그 후로 서커스로부터 독립한 스탠은 유명한 독심술사로 승승장구하지만 돈과 명예를 향한 욕망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갑니다.
스탠은 대놓고 나쁜 짓을 하거나 범죄를 위해 머리를 짜는 ‘계략가’ 형의 인물은 아닙니다. 피트의 죽음에 일말의 책임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계획적인 살인은 아니란 거죠. 이 사람의 본질은 양심적이며 주어진 일에 충실한 평범한 사람인데, 그렇게 ‘닳아빠진’ 인간은 못 됩니다. 스탠을 비난할 유일한 핑계는 메틸알코올을 건넨 사실을 사람들에게 털어놓지 못했다는 건데, 솔직히 그런 상황에서 용기를 갖기란 여간해선 힘이 듭니다.
하지만 자신의 실수를 함구하고 용서를 구하지 않은 대가로 손에 들어온 기회는 자신도 몰랐던 욕망에 불을 지르는 도화선이 됩니다. 피트의 죽음 이후로 스탠은 이기적이고 배은망덕하며 출세와 돈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인간으로 서서히 변하기 시작합니다.
‘범죄 영화’라기보다 ‘멜로드라마’에 가까운 이 영화는 한 남자의 성공과 몰락을 일대기적인 서사로 그리고 있을 뿐, 작정하고 범죄를 고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보다 인간의 감추어진 욕망과 이기심. 물불 가리지 않고 목적을 추구할 때 저지르기 쉬운 실수, 잃어버린 기회, 가시덤불 속의 풍선처럼 위태로운 인간의 양심 등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이기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욕망을 좇던 남자의 인생을 무척 드라마틱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영화가 세상에 나올 당시(1947년)와는 달리, 오늘날 고전으로 평가받는 이 영화의 ‘느와르’적인 면모는 스탠 주변에 배치된 다양한 성격의 여성 캐릭터들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회를 주고 선심을 베풀었으나 오히려 배반당하는 지나, 스탠을 유혹하고 악의를 부추기다가 배반을 하는 ‘릴리스’, 상승과 몰락을 함께 경험하며 스탠을 끝까지 지켜주는 ‘몰리’.
이야기를 주도하는 주인공이 아닌, 주인공(남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이야기 진행을 돕는 여성 캐릭터의 활용에 대해, 클리셰에 갇힌 여성 캐릭터들로 넘치는 느와르 장르에 대해 오늘날 여성주의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시대상의 반영일 뿐이라는 핑계로 스스로를 변호하는 남성 관객들의 목소리도 듣고 싶습니다.
권선징악의 결말은 거의 모든 관객들이 무리 없이 받아들일 만합니다. 지극히 평범하고 지극히 안일한 결말이죠.
안일하다는 표현을 한 건 영화의 임팩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극적인 임팩트의 부재라기보다는 관객들의 도덕성과 가치관을 뒤흔드는 무언가가 없어 보입니다. 지금의 결말은 마치, 나쁜 짓을 했어도 그만큼 험한 꼴을 당했으니 용서해도 되겠지,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영화 속의 결말과 경찰을 피해다니며 알코올과 노숙으로 연명하다가 결국엔 ‘미치광이(geek)’의 역할로 서커스의 구경거리로 전락하는 원작 소설 속의 결말을 비교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처럼 보입니다. 어마무시한 재력과 권력을 앞세워 악행을 서슴지 않고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악당들은 운이 좋은 걸까요, 아니면 시대를 잘 타고난 걸까요.
스탠이 독심술 쇼를 하는 걸 보면, 우리 무당들의 ‘공수’에 가깝습니다. 특히 지극히 사적인 사실들을 자신 있게 떠벌이는 스탠을 보면, ‘코드’가 문제가 아니라, 소위 말하는 ‘신기(神氣)’란 게 있나 싶기도 합니다. 트릭을 통해 그런 사실들까지 알아내는 게 도저히 가능해 보이질 않거든요.
‘길예르모 델 토로(Guillermo del Toro)’의 리메이크 소식이 있습니다. 보면서 판타지의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좋은 리메이크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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