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디아’는 어린 아들 ‘찰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남편, ‘롭’이 어엿하게 살아있지만 리디아는 싱글맘과 다를 게 없어요. 롭은 아내는 물론이고 찰리조차 거들떠보지도 않고 경제적으로 지원도 하지 않습니다. 방직 공장 같은 곳에서 리디아는 돈을 열심히 벌지만 집세도 내지 못해 쫓겨날 위기에 처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작은 실수로 직장까지 잃고 맙니다.
‘진’은 의학 공부를 마치고 의사 자격을 딴 후에 부친이 죽으면서 남긴 고향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리디아가 사는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의사죠. 고향을 떠났던 건 의학 공부를 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과거에 동네에 어떤 추문의 주인공이었던 것 같은데 부친(역시 의사)이 서둘러 딸을 멀리 보냈던 거죠.
진의 진료를 받았던 찰리를 계기로 두 여자가 만납니다. 진과 리디아 사이엔 교감과 우정이 싹트고 리디아의 어려운 사정을 알게 된 진이 제 집에 들어와 살 것을 권합니다. 한 지붕 아래 살게 된 두 사람 사이에 연민과 우정 이상의 감정이 그 씨앗을 엽니다.
영화의 시작은 평범합니다. 인물들이 소개되고 이야기가 전개되는 양상을 지켜보자면 어떤 이야기일지, 끝은 어떨지 충분히 짐작이 가능합니다.
두 여자에 관한 소문이 나는 건 순식간입니다. 게다가 1950년대 스코틀랜드의 작은 시골 사람들이 타인의 사생활에 관대하지 않았던 건 분명하죠. 더욱이 동성애라니요. 굳이 70년 전의 바다 건너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사정이라고 별로 다를 것 같지 않으니까요.
영화가 두 인물에게 대하는 대접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리디아의 남편 롭은 무심하고 가끔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누이 ‘팸’은 가부장제의 전형적인 추종자이고 ‘전통적인 성 관념’에 충실하려는 사람이죠. 영화는 두 인물을 내세워 주인공들에게 압박을 가하기 시작합니다.
여기까지 본다면 전형적인 퀴어 서사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동성애자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그에 압박을 가하는 여러 장치들을 제시하죠. 연인들은 힘든 시기를 견뎌 내거나 깨끗이 포기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결말을 예측하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편견과 사회적 압력에 두 연인이 헤어지거나(새드엔딩), 아니면 그런 것들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사랑을 쟁취하거나(해피엔딩).
이 영화 역시 그 흐름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야기 자체로만 본다면 뻔하고 예측가능한데다 식상하죠.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이상의 무엇’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익숙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진부함을 극복해낸 건 아주 색다른 이야기,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가 아닙니다.
영화의 얼개를 보면 두 주인공이 감정을 키우는 부분에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두 인물이 자신들의 감정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은 로맨틱한 감성과 멜로드라마적인 재미가 풍성합니다. 다짜고짜 동성애자 인물들을 스크린 위에 던져놓고 관객들이 반응하길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현명한 플롯으로 보입니다.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기 이전에 관객들에게 필요한 건 ‘감정’이니까요. 주인공들의 감정에 서서히 동화되면서 관객들은 인물들에 빠져들고 이야기에 더 깊이 참여하게 됩니다.
인물들의 면면을 봐도 그런 플롯이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진이라는 캐릭터는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걸 일찌감치 깨달은 사람이지만, 리디아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리디아의 변화를 보여주고 설득시킬 충분한 공간이 필요했던 거죠. 그런 면에서 리디아의 관점이 더욱 흥미롭습니다. 여태까지 몰랐던, 숨겨왔거나 억눌려왔거나, 어쨌거나 살아오면서 전혀 느끼지 못했던 감정, 한 번도 드러난 적이 없었던 자신을 발견하는 거니까요. 약간의 비약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자신을 마주하는 리디아의 모습은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성장 영화로 볼 수도 있어요.
두 여자를 관찰하고 이야기를 들려주는(영화는 성인이 된 찰리의 회상입니다) 찰리의 입장 역시 관객의 흥미를 돋웁니다. 이야기의 시발과 위기를 가져오는 역할은 모두 찰리의 몫입니다. 외로운 엄마에게 친구가 생기는 걸 가장 응원했던 것도, 엄마와 마을 의사의 관계를 폭로하는 것도 찰리니까요. 찰리의 악역엔 이유가 있습니다. 찰리는 (두 사람이 동성애자여서라기보다) 서로에게 솔직하기로 한 약속을 엄마가 먼저 깼다는 사실에 분노합니다. 엄마에게 화가 난 찰리는 두 사람의 관계를 아빠와 고모에게 폭로함으로서 영화에 위기를 가져옵니다. 진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엄마의 솔직한 고백은 찰리의 분노를 잠식시키기에 충분합니다.
비밀과 거짓말, 소문의 파괴력, 책임, 진정한 사랑, 타인의 삶을 바라보는 태도, 선한 영향력과 관용의 가치 같은 것들을 깨달으면서 찰리는 한층 성장합니다. 엄마와 의사 선생님의 삶이 모든 어른들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각성은 찰리로 하여금 어른들의 세계를 살짝 엿보게 만듭니다. 나중에, 완전히 자란 후에 진정 발을 들이게 될 진짜 세계말이죠. 아이들의 세계라고 가짜인 것은 아니지만요.
‘완전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감상할 가치는 충분합니다. 원형적인 이야기를 변주하기보다 그 테두리 안에 안주하면서 밀도 있는 이야기를 남아냅니다. 안일하고 게으른 영화 같지만 그만큼 안전하고 무게중심이 잘 잡혀 있는 영화죠.
치밀한 복선, ‘벌’의 생태를 활용한 디테일, 잔잔하지만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감정을 담은 이야기, 긴장감과 속도감 넘치는 절정과 달콤쌉싸름하고 아이러니로 가득한 결말, 다양한 감상이 가능한 다채로운 관점 등이 매력적인 영화입니다. ‘안나 파퀸(Anna Paquin)’의 좋은 연기와 ‘홀리데이 그레인저(Holiday Grainger)’라는 배우의 발견은 덤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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