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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_2019-리뷰

달콤한 쿠키 2020. 3. 20. 07:51


중만은 일하는 사우나 라커에서 어마어마한 돈이 든 가방을 발견합니다. 주인은 있을 터인데 찾으러 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분실물 처리를 하는데, 돈은 돈인지라 중만의 마음에 욕망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중만은 치매에 걸린 노모에, 딸 대학 등록금에, 돈 들어갈 데는 많은데 생겨날 구멍은 아예 없었던 거죠. 중만이 물욕과 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동안 돈 가방 주변으로 다양한 군상이 모여듭니다.

 

영화가 관객들을 이야기에 잡아두는 미끼는 아주 단순합니다. 많은 인물들 중에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이냐죠. 즉 누가 돈을 차지하게 되느냐의 문제인데, 그게 좀 뻔합니다. 인물들 중에 가장 그럴싸한 사람, 관객들이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응원하고 싶은, 썩 좋진 않지만 그나마 드라마가 잘 짜인 인물이겠죠.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합니다.

 

왜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지 한 번 상상해 볼까요. 아마도 돈 가방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물들을 배치하여, 그들의 돈에 얽힌 다양한 욕망과 심리, 드라마를 풀어내려는 의도가 아마 최우선이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영화가 늘어놓는 인물들은 (아주 좋게 말해) 그냥 평범합니다. 굳이 돈을 내고 극장 안으로 들어가 시간을 들여 보고 싶은, 볼 만한, 꼭 봐줄 그런 인물들이 없다는 거죠. 모두들 시원찮은 동기에 뻔한 의도로 행동하고 난 그 돈이 필요해만 외치고 있을 뿐입니다. 관객의 마음을 흔드는 인물은 거의 없습니다.

 

돈의 원래 주인인 미란의 이야기나 중만의 사연은 그나마관객들의 인간적인 면에 호소하는 면이 있지만 다른 인물들은 형편없습니다. 전형성만 부각된 캐리커처를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면 꼭두각시 같아요. 외피만 있고 내면은 없죠. 돈이 정말로 필요한 사람들이 아니라, 돈이 필요한 역할을 부여받은 레고 인형들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해야 되는 일이 아니라 이야기가 요구하는 일만 합니다. 한 마디로 재미있는, 관객들을 사로잡는,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인물들이 전혀 없습니다.

단적인 예로, 전도연이 연기한 연희는 눈 한 번 깜짝도 않고 사람을 죽이면서도 박사장에 대해서는 순한 양입니다. 빚 갚을 돈이 없는 연희라면 박사장을 죽여 없애는 게 가장 편한 방법 아닐까요.

 

이야기는 그럭저럭 굴러가지만, 인물들이 이런 모양새이니 이야기에 깊이가 생길 리 없습니다. 물론 감독이 이 영화에 엄청난 철학이나 가치관을 담을 의도는 없었다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정도면 총체적으로 난국입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절실함도 없고, ‘짐승들처럼 인간성의 밑바닥까지 드러내는 순간도 없습니다.

 

관객들이 이런 영화에 바라는 건 돈 가방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증을 해소해달라는 게 아닙니다. 돈 가방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한바탕 소동을 보고 싶은 거죠. 그 소동은 물리적인, 슬랩스틱 같은 소동이 아닙니다. 인간들의 다양한 욕망들이 부딪히며 생기는 정서적인 혼란이죠. 관객들은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소동의 주체, 욕망들의 주체, 서로 반목하는 사람들이 펼치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돈과 클라이맥스를 거치며 서서히 그것이 질서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고 싶은 겁니다. 그런 이야기는 관객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발견하도록 도와줍니다.

 

영화는 그런 소동을 그려내는 데 실패했습니다. 이야기는 얄팍하고 제 틀에 갇힌 인물들은 생기가 없고, 대사는 맥이 빠지고, 결말은 뻔합니다. 형편없는 이야기 안에서 배우들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쯤 되면 배우들의 낭비죠. 재미있으면 다라고요? 그렇게 말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전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게 문제란 말이죠.

 

스타일은 좋습니다. 각 인물들에게 할당된 시퀀스를 잘게 쪼개어 교차시키며 보여주거나 시간의 흐름을 무시하는 편집 방식은 외국의 어느 감독을 연상케 하지만, 그걸 트집 잡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하지만 겉멋만 든 태가 역력합니다. 형편없는 음식에 아무리 플레이팅에 신경 써 봤자, 맛없는 음식이 갑자기 맛있어질 리는 없는 거니까요. 담은 그릇이 찌그러진 양은 냄비라도 담긴 음식이 맛있을 뿐 아니라 만든 사람의 수고와 정성이 읽히기까지 하다면, 그 음식은 어떤 산해진미보다 진귀하고 맛있는 것이 됩니다. ‘이야기라고 다를까요.

 

사족

 

정우성이란 배우에 대한 선입견이 있어서인지, 이 사람이 양아치처럼 구는 게 몹시 어색합니다. 저만 그런 걸지도 몰라요.

 

정만식은 굉장히 순한 얼굴에 어떻게 저런 표정과 연기가 나올 수 있는지. 그런데 왜 저런 역할만 떠맡는 거죠. ‘멜로장르나 여리고 순둥순둥한 역할도 잘 소화하는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