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보기_영화

이너프 세드_Enough Said_2013-리뷰

달콤한 쿠키 2020. 4. 2. 07:55


이혼하고 혼자 딸을 키우는 에바는 어떤 파티에 참석했다가 알게 된 앨버트란 남자로부터 데이트 신청을 받게 됩니다. 앨버트가 먼저 연락을 한 걸 보면, 그에 대해 벌로 큰 인상을 못 받은 에바와는 달리, 앨버트는 에바에게 호감을 가졌던 게 분명합니다. 여차저차 두 사람은 데이트를 거듭하고 사랑에 빠집니다.

 

마사지사로 일하는 에바는, 역시 파티에서 만난 매리앤을 고객으로 다시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금세 친구가 됩니다. 유명한 시인인 매리앤 역시 이혼의 아픔을 딛고 딸을 혼자 키우고 있었는데, 그녀는 실패한 결혼에 대한 불만을 토로할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며 에바에게 전남편 흉을 있는 대로 봅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전남편은 완전 뚱보에 게으르고 지저분한, 형편없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걸 어째요. 알고 보니 매리엔의 뚱보에 게으르고 지저분한 전남편은 바로 앨버트. 에바에게 앨버트는 자상하고 듬직하고 사랑스러운 남자인데 말이죠. 에바는 자신이 앨버트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리앤을 대합니다. 마찬가지로 앨버트에게도 새로 만난 고객이 그이 전처라는 사실을 함구합니다.

에바의 비밀은 지켜질 수 있을까요.

 

결과 먼저 적자면, ‘아니오입니다. 에바의 비밀은 만천하에 드러나 망신을 당하고 두 사람으로부터 원망을 피할 수 없게 되죠.

차라리 처음부터 솔직했더라면, 새로 사랑하게 된 남자에 대해 불평만 늘어놓는 매리엔에게 그만 하라고 부탁을 했다면, 그리고 앨버트에게도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된 사람이 바로 그의 전처라는 사실을 고백했더라면, 상황은 나빠지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에바는 그러지 않음으로서 제 무덤을 팝니다. 나중에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 앨버트와 매리앤은 에바에게 등을 돌립니다. 사랑과 우정을 나누고 믿음을 준 사람들의 마음에 칼을 꽂은 대가죠.

 

에바는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기회를 놓쳤을 수도 있지만, 늦게라도, 상황이 더 진흙탕이 되기 전에 빨을 뺄 기회는 에바에게 분명히 있었습니다. 차일피일 미룬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럴 마음이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왜 그랬을까요.

 

실패의 경험으로 에바는 스스로를 보호하려 합니다. 새로 만난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미리 알 수만 있다면 시간을 벌고 노력을 아낄 수 있겠죠. 자신은 안전선 안에 머물면서 더 쉬운 연애를 기대했을 겁니다. 그것도 그 정보들이 같이 살았던 여자에게서 나온 것들이라 더 믿을 수 있을 것 같았겠죠.

 

그렇게 에바는 직접 앨버트를 경험하고 알아갈 기회를 스스로에게서 빼앗아 버립니다. 그리고 매리앤의 경험에 기대려 하죠. 에바가 앨버트에 대해서 못마땅한 건 매리앤이 그에 대해 못마땅해 했던 겁니다. 하지만 그건 에바 자신의 경험이 아닙니다. 에바는 매리앤의 시선으로 앨버트를 판단하고 앨버트의 단점에 대해 매리앤과 같은 태도를 취하려 합니다.

매리앤의 의견은 에바에게 앨버트에 대한 선입견으로 작용하고 에바는 매리앤에게 그럴 의도가 아주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영향력 아래에 자진해서 발을 들입니다. 유명한 시인에 부유하고 우아한 매리앤은 아무래도 에바에게 영향력을 끼치기 쉬웠을 겁니다. 매리앤이 에바에게 나쁜 영향을 주었다고 그녀를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보호하려던 에바는 두 사람은 보호하지 못합니다.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리죠.

 

우리들은 때때로 타인의 의견에 너무 마음을 열고 있지 않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스스로를 못 믿어서일 수도 있고 아무래도 경험자의 말이라면 무턱대고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상대방과 나는 다릅니다. 차이가 있다면 이미 경험을 했고 아직 하지 못했고의 차이죠. 경험이 있다고 치더라도 그의 경험과 나의 경험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 좋다고 나에게도 좋은 게 아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건 당연하죠.

 

우리가 가려는 길이 보이는 것처럼 평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뙤약볕이 쏟아지고 가파른 경사에 무서운 육식동물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지만, 그 길을 스스로 걸어보기 전까지는 길옆에 피어 있는 들꽃들의 아름다움에 취하는 즐거움은 결코 경험하지 못 할 겁니다.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스스로의 욕구에 충실한 것이, 어쩌면 그다지 위험한 모험은 아닐 겁니다. 몸을 사리기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아 보입니다.

 

아기자기하고 유쾌한 영화입니다. 작정하고 웃기려는 건 아니지만 보는 내내,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습니다.

또한 영화의 디테일이 굉장히 섬세합니다. 화면 구석구석, 인물들의 표정과 대사, 반응 하나 하나가, 영화가 말하려는 결혼과 사랑, 관계 맺음에 대한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연출도 한몫했겠지만 무엇보다 탄탄한 시나리오, 이야기의 힘인 것 같습니다.

 

한동안 연락을 끊고 지내던 두 사람은 결국, 다시 만납니다. 그 이후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두 사람이 다시 만나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에서, 한바탕 시련 후에 굳어진 두 사람의 감정을 읽을 수 있었으니, 아마도 해피엔딩이겠죠. 그러길 바랍니다.

 

우리나라에 개봉한 적은 없는 것 같고, 좋아하는 배우, 지금은 고인이 된 제임스 갠돌피니(James Gandolfini)’의 필모를 뒤지다가 발견한 영화입니다.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로맨틱 코미디에 잘 어울렸습니다.

그 외에 여러 배우들이 호연합니다. ‘토니 콜렛(Toni Collette)’, ‘캐서린 키너(Catherine Keener)’, 웃는 얼굴이 예쁜 줄리아 루이 드레이퍼스(Julia Louis-Dreyfus)’등의 배우들도 눈을 즐겁게 합니다.

 

제임스 갠돌피니의 명복을 빕니다.

 

사족

 

영화 원더(Wonder)에서 주인공을 괴롭히는 아이의 엄마에게 교장 선생님이 이런 충고를 합니다. 아주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비슷합니다.

 

타인의 단점이나 그 사람을 바꾸는 건 불가능하죠. 그러니 우리의 생각을, 그의 단점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꾸는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나는 타인들의 단점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다는 조건 하에서) 얼마나 관대해질 수 있는지 자문하게 됩니다.